에피그노시스-3

  • LV 1 김우현
  • 조회 4870
  • 2014.01.19 21:00
  • 문서주소 - http://birdnamoo.com/bbs/board.php?bo_table=figtree&wr_id=33

 

나는 아버지의 뜻을 더욱 깨닫게 해달라고 구했다.

물론 이것은 지난 몇 년간 나의 가장 중요하고 간절한 간구였다.

그러나 다시 나는 어린 아이의 심령으로 그 기도를 하며 뒷골목을 쏘다녔다.

집에서도, 사무실에서도 계속 이 간구를 뿌렸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롬2:17-19

 

 

이전에도 로마서의 이 구절을 여러번 읽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유대인들의 무지와 패역을 책망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깊이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 말씀이 열려서 다가온 것이다.

주목을 끈 것은 바울의 관점, 내가 알고자 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율법의 교훈’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 행하고 순종하려고 하지만 아주 솔직히 고백하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피그노스tm)‘에 깊이가 부족하다.

신앙의 교리, 영적인 일반에 대한 기초는 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 본질을 알고 그분의 기뻐하시는 ‘선한 것’을

분별하는 영적 감각은 매우 부족하다.

유대인들에게만 하는 경고로 알았던 말씀이 갑자기 내게 큰 자극을 주었다.

내가 진정으로 갈망했던 ‘하나님의 뜻’이 ‘율법의 교훈’ 가운데 있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고 오히려 신선하기까지 하다.

갑자기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은밀한 비밀이 공간에 혼자 들어간 기분이었다.

율법의 가르침은 방대하고 엄청난 구조이다.

그것의 표면은 우리를 질리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한다.

그러나 그 안에 놀라운 아버지의 신비, 구원의 디자인이 풀린다면 얼마나 멋진일인가!!!

우리는 ‘율법’을 매우 딱딱하고 건조한 법조항, 규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의

대극적인 개념처럼 이해하고 있다.

오히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저지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율법의 교훈’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에 깊이 주목하는 이들은 드물다.

이 개념은 이미 몇 년 동안 이스라엘로 인도되어 가면서 가장 크게 열린 부분이다.

진리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고 구하는 내게 다시 이 원리에 집중하게

하시는 것이다.

나는 다시 새로운 말씀에 인도되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쓴 이 구조와 매우 흡사한 것은 에베소 교회에도 썼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딤전1:6-8

 

바울이 말하는 ‘이 교훈’은 무엇인까?

물론 예수님의 가르침이고...그것을 깨닫고 다듬어서 전하는 바울의 교훈이다.

그러나 그 당시엔 그것을 반대하는 ‘다른 복음’이 교회를 위협하였다.

아무래도 그것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하는 당시의 유대교의 사람들이리라.

그들은 교회에 침투해 들어 와서 율법의 조항들..., 할례나 정결례등을 행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가르쳤다.

바울은 극렬하게 이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결코 바울이 '율법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율법을 중요시 여기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3:31

 

 

나는 이스라엘에 가서 이것을 처음 읽었을 때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내가 생각해 오던 율법에 대한 이해의 반대되는 개념을 그가 말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요구하던 이들에 비판을 통해서 유대인들에

부정적인 이해를 키웠다.

그러면서 ‘율법’자체를 부정적으로 매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다른 복음이 될 수가 있다.

바울의 가르침을 정확히, 온전하게 살펴야 한다.

오히려 그는 ‘율법’을 ‘적법’하게 사용하면 그것이 ‘선한 것’이라고 한다.

'선하다‘의 헬라어는 ’칼로스‘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토브’와 같은 것으로(바울은 히브리적인 개념으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답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다.

로마서에서 ‘율법의 교훈’으로 하나님의 뜻과 선한 것을 분별한다고 했다.

‘적법’이란 ‘노미모스‘로서 ’노모스(율법)‘에 합당하게’라는 의미이다.

율법이 본래 말하는 목적 그대로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기쁜 것이 된다.

바울은 항상 이 기초를 가지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의 본질적인 의미, 참된 뜻, 곧 그 안에 감추인 하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적법하게)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 ‘교훈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선한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은 이 부분을 강하게 책망했는데...교회는 표피적인 것만 읽어내고

율법이 악하다는 부정적인 관점을 키운 것이다.

이것 역시 ‘다른 교훈’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 동일하신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는 영원한 본질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10:4

 

이것 역시 율법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이해하게 한 구절이다.

그러나 그동안 율법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잘못 해석한 것 뿐이다.

‘율법의 마침’이란 부정적인 의미에서 ‘끝(end)'가 아니다.

그것은 헬라적인 개념이다.

헬라어로는 ‘텔로스’로 쓰여진 그 말의 의미는 ‘목적’, ‘결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바울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빌3:5)이다.

히브리적인 관점에서 ‘끝’은 패망, 심판, 끝장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회복’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그래서 심판조차 회복이시다.

그러나 헬라적인 관점을 가진 이들은 심판을 아주 표면적이고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종말에 대하여 외적인 징조, 상황, 환난, 심판의 구조만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종말은 구원의 완성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가 되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 곧 율법의 교훈의

본질적 결실이 되신 것이다.

주님은 율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유대인들에게 “이 성경이 곧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요5:39)이라고 하셨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역사의 모든 증거가, 십자가와

부활, 성령을 보내신 모든 것, 재림의 모든 언약들이 ‘율법의 교훈’이 맺은 열매라는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5:17

 

주님의 이 음성을 깊이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완전하게 하다’는 ‘플레로오’라는 단어이다.

이것은 ‘충만하게 채움(to fulfil)'이다.

율법의 본래적 가르침의 의미를, 거기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선하신 것을

깨닫고 가르치고 행하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 기초를 붙들었다.

그리고 ‘율법의 교훈’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기를 기도하였다.

‘율법’이라는 히브리어 ‘토라’ 자체가 ‘하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건조하고 무거운 법적인 느낌의 번역은 헬라적이다.

이미 몇 년 동안 예수님의 복음서에서 율법의 언약 구조를 찾는 작업을 했었다.

역시 주님의 공생애와 말씀, 역사들은 율법의 깊은 가르침에서 열매맺은 것이다.

그런데 다시 율법의 교훈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거기에 감추인 매우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이 곧 내게 ‘에피그노시스’가 되었다.

 

Pr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