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의 히브리적 배경 (3) 교부들의 증언, 사해사본, 동전, 비문

  • LV 8 이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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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22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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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언어가 히브리어라는 것을 가리키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그 증거들은 교부들의 증언, 사해사본, 동전과 비문들, 요세푸스의 글, 랍비 문헌 등 다양하다.


교부들은 초기 기독교의 지도자들로 그들의 기록은 초기 기독교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2세기 중반 소아시아에 있는 히에라폴리스의 주교였던 파피아스는 “마태는 히브리어로 주님의 말씀을 기록했고 다른 이들이 그들이 할 수 있는대로 그것을 번역했다”고 했고 2세기 후반에 프랑스 리용의 주교인 이레니우스는 “마태는 히브리인들 가운데 그들 고유의 방언으로 그의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했다.

3세기 초 오리겐은 그의 마태복음 주석에서 “히브리어로 작성한 첫번째 복음서는 마태가 쓴 것으로 유대교에서 믿게 된 자들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라고 했고 기원후 325년 경 가이사랴의 주교인 유세비우스는 “마태는 처음에 히브리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려고 할 때 그의 복음을 그들 고유의 언어로 기록하여 전달했다”고 한다.

교부들 중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인 나사렛 파에 대하여 증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에피파니우스는 그들에 대하여 “그들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마태복음 전체를 갖고 있다. 그들은 그것이 처음 히브리어로 기록된 상태로 그것을 신중히 보관하고 있었다”고 증거한다.

교부들 중 히브리어에 대하여 가장 박식한 것으로 알려진 제롬은 마태의 복음서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다. “마태는 유대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히브리 문자와 단어로 기록했다. … 그것은 아직도 가이사랴의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1947년 이스라엘의 사해 북서쪽 해변에 있는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성경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성경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사해 인근 쿰란 지역의 총 11개의 동굴에서 두루마리들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발견된 두루마리들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사이에 기록된 것이다.

이 두루마리들은 크게 성서와 비성서 두루마리로 구분되며 구약 성경에서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성서 사본이 발견되었고 성서 이외의 두루마리들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기원후 1세기의 예수님 시대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풀러 신학대학의 윌리엄 샌포드 라소르 교수는 뛰어난 셈어 학자다(히브리어 아람어는 같은 셈어 계열이다). 그는 “사해 사본의 발견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언어는 아람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쿰란에 거주했던 종파는 히브리어로 성서에 대한 주석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 들어온 자들을 위한 지침서(훈련 지침서)와 다메섹 언약서와 같은 공동체 삶의 규칙에 대한 책도 히브리어로 기록했다”고 한다.

기존의 학설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사용하던 아람어가 이스라엘 백성의 일상 언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 시대까지 지속되어 성전 제사와 같은 종교적 분야에만 히브리어가 사용되었고 일상적으로 아람어가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아람어는 기원전 700-300년 사이에 페르시아, 앗수르, 바벨론에서 사용하는 공식적인 언어였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 당하여 흩어졌고 남왕국 유다도 바벨론에게 침략당하고 많은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아람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에 바벨론에 끌려갔던 백성들 중에서 소수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아람어를 사용했으나 유다에 남아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전히 히브리어를 사용했다. 그 시대에는 아마도 히브리어와 아람어 모두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167년 이스라엘 땅을 다스리던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성전을 더럽히는 일이 발생한다. 이 일로 유다스 마카비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나고 그들은 성전을 정결하게 하였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 사이에 종교적 부흥으로 이어졌고 그들은 점차 조상들이 사용한 히브리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사해사본의 발견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히브리어를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시대에 사용된 동전 또한 그 시대에 사람들이 사용하던 언어에 대한 중요한 증거가 된다. 이스라엘 박물관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발견된 동전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그 동전들의 연대는 페르시아 제국 후기인 기원전 4세기부터 바르코크바 혁명이 끝날 때인 기원후 135년에 이른다. 이 중에서 오직 하나의 동전이 아람어로 기록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이다.

또 다른 증거는 죽은 자들의 뼈를 담는 유골 단지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죽은 자를 장사하고 정확히 일 년 후에 그들의 뼈를 돌로 된 작은 용기에 넣는다. 일반적으로 이 유골 단지의 외부에 죽은 자의 이름을 새겨넣는다. 이 비문은 숙련된 장인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가족이나 친구가 새긴다. 그러므로 이 비문은 이 시대에 일반적인 사람들이 말하고 쓰는 언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폴라드의 성직자이자 뛰어난 학자인 아베 J.T. 밀릭은 이렇게 말했다. “유골 단지에 헬라어나 아람어가 아니라 히브리어가 새겨진 것은 그 시대에 중산층이 사용하는 언어가 히브리어이며 이것이 종교적으로만이 아니라 일상 언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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