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의 히브리적 배경 (13) 최근의 언어학 연구

  • LV 10 이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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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09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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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사해사본이 발견된 이후 이스라엘의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의 시대에 이스라엘 땅에서 유대인들이 말하고 기록하는데 사용한 언어는 히브리어이고 공관복음서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자료에서 나온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들은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학자들로 신약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안했다. 사해사본이 발견된 것으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말하는 방식이 상당히 히브리적인 표현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이것을 통해서 복음서를 더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언어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신약 성경의 많은 오역들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예호슈아 M. 그린츠는 “2차 성전 시대 말기에 말과 글로 사용된 언어인 히브리어”라는 글을 썼다. 그는 마태복음과 복음서와 같은 시기에 기록된 다른 문헌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히브리어는 그 시대에 기록하는데 사용되는 유일한 언어이며 우리는 이런 이유로 ‘학문 없는 보통 사람들’(행 4:13)로 이루어진 새로운 종파가 유대인들을 위하여 그들의 중요한 책을 히브리어로 기록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더 나아가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는 팔레스타인, 또는 적어도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에서 말하는데 사용된 주요 언어였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주장에 대한 근거로 탈무드 네다림 66b에 나오는 바벨론에서 온 아람어를 말하는 유대인 남자가 예루살렘 출신의 아내와 대화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그것은 예루살렘 지역 평민들은 아람어가 아닌 히브리어만을 일상 언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아람어만을 사용하는 유대인과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데이빗 플루서 교수와 신약과 초기 기독교에 대한 세계의 권위 있는 유대인 학자들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원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확고하게 주장한다. 그는 공관복음서에 오직 히브리어에만 있는 수백 개의 셈어 관용구가 있다고 말했다.

모셰 바르-아셰르 박사는 히브리 대학에서 예헤즈키엘 쿠처 교수를 이어 최고의 아람어 학자로 인정 받은 사람이다. 그는 공관복음서가 처음에 아람어가 아니라 히브리어로 기록된 문서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스라엘 이외에도 세계의 뛰어난 학자들 역시 예수님이 사용하신 언어가 히브리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한 학자 중 하나는 노르웨이의 해리스 버클랜드이다. 그는 “예수의 언어”라는 글에서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서민들의 언어는 히브리어”였으며 그의 결론은 “예수님은 실제로 히브리어를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패서디나에 있는 풀러 신학교의 명예 교수인 윌리엄 샌포드 라소르는 저명한 셈어 학자다. 1982년 4월 24일 예루살렘의 강의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해사본이 발견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언어는 아람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쿰란에 있던 종파는 성경의 주석 뿐만 아니라 새로 들어온 자에 대한 지침서인 규율 지침서와 다메섹 언약과 같은 공동체의 삶에 대한 책들도 히브리어로 기록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프랭크 크로스 교수는 사해사본의 필사에 있어서 당대에 가장 앞선 권위자일 것이다. 크로스 교수는 쿰란에서 수 세기에 걸쳐 두루마리들을 필사한 다양한 서기관들의 필사본을 관찰한 결과 기원전 130년 경부터 시작해서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언어는 히브리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기원전 130년 이후에 쿰란의 서기관들은 히브리어 본문을 필사하면서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크로스는 그들의 주된 언어가 히브리어였고 그들은 아람어의 문법과 문장 구조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고 결론지었다.

또 다른 훌륭한 학자로 아베 J.T. 밀릭이 있다. 폴란드의 성직자인 밀릭은 과학과 고고학 분야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쿰란의 발굴자들 중 하나였고 제4동굴에서 나온 두루마리들을 출판하는 일을 하는 국제적인 팀에서 가장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유대 광야에서 발견한 문헌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한 후 밀릭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제2차 반란 때의 구리 두루마리와 문서들은 로마 시대에 유대 지역의 일상 언어가 미쉬나 히브리어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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