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의 관점 (1)

  • LV 3 김동훈
  • 조회 4171
  • 2014.02.06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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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나와 데오빌로에 관계를 증명하기 이전

먼저 데오빌로의 가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조사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러나 가계만 해도 엄청난 양이다..

한번에 다 파헤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므로

한 걸음씩 자료를 검증하면서 신중하게 가보려 한다. 

조금만 파도 추가로 연구해야 할 항목들이 무수히 떨어진다..

그러나 순서가 조금 뒤섞이고 왔다갔다 하고 중복이 되더라도.. 

일단 가보련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눅 3:2


대제사장 데오빌로의 가족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중요한 두 제사장을 포함하고 있다.

바로 안나스와 가야바 이다.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요18:13)이다.

데오빌로의 가족에 대한 내용은 사도행전 4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행4:6)

문중이라는 말은 ’게노스’ 라는 단어인데 혈통, 가계, 친척 이란 의미이다.

이 가족 중에 요한과 알렉사던에 대해서는 긴 주제이므로 조금 후에 자세하게 다루려고 함.

(여기까지만 해도 많은 힌트가 보이고 구체적으로 연구할 인물들이 보임)



눅 1:5 을 통해 헤롯시대 성전에서 봉사한 사가랴가 제사장이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데오빌로는 아마 사가랴의 아들 요한(세례요한)에 관하여 많이 알고 있었을 것임.

요한은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데오빌로 와 헤롯의 청지기와 결혼한 사람 요안나  

양쪽 다 친숙한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미리엄)은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과 친족이다.

나는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어릴적 부터 서로의 소식을 잘 알고 있진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세례 요한에 대한 관점


신약학회에서 어떤 이유로 인해 요한이 쿰란의 에세네파와 관련이 없는 것이 이슈가 됨.

이유는 일반적으로 요한의 쿰란과 관련된 자료가 부족하고,  

요한의 광야와 요르단 강의 여정에 구체적 위치에 대한 자료도 부족하다는 것.

하지만, 이 논리의 오류는 무엇인가?

우리는 사해 사본을 통해서 쿰란은 반성전 체제의 분파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성전 제사장들이 부패했고 그들의 신권이 손상되었다고 판단 후, 광야로 나왔다.

만약 누가가 남쪽 요르단 지역에서 온 사람과 그곳에서 일어난 일  

그리고 사해 사본에서 찾은 것과 유사한 메세지를 묘사하려 했다면  

특히 편지 받는 사람(대제사장데오빌로)을 고려하여 그가 쿰란 분파 출신인 것을  

명시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성전 체제의 데오빌로는 쿰란 같은 반성전 체제의 움직임을 가장 주시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한편 쿰란과 인접한 곳에, 요한의 삶에 다른 요소들이 나타나는데 

그는 성전 체제에 도전하는 인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세례(침례, 미크베 : 정결례)는 회개와 죄사함을 위한 것이다.  

이 규범은 시골이나 광야에서 개별적으로가 아닌 성전체제에 의해 허가된,  

성직에 의해 형성된 성전의식이었다.     



사람이 죄에서 자유하게 되는 요한의 선언은 그의 요단강에서의 세례(미크베 : 정결례) 때문에  

1세기의 어떤 유대인에게라도 반성전 운동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데오빌로는 누가 복음의 이야기에 이러한 세부 사항을 인식했을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관점


요한은 예수님의 전신이고 예수님은 요한을 주목하였다. 

요한은 성전체제에 도전적으로 묘사되었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인식이 되었을 것이다.

누가복음(눅3:4-6)에 세례요한은 가장 중요한 쿰란의 텍스트인 이사야 40:3-5을 인용한다.

“광야에서", “길을 준비하는”

예수님은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역을 설명하는데 이사야서를 인용했다.

(눅 4:18-19에 사 60:1,2, 사 58:6)

예수님은 (눅7:25)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왕궁에 있는 사람들,  

제사장에 직무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함께 요한을 대조.

(눅3:2 절에서도 성전체제의 제사장과 광야의 요한의 사역을 대비하고 있음)

 예수님의 사역은 요한의 사역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졌고

그는 심지어 자신의 설교에서 요한의 말을 일부 인용했다.

(마 3:7, 마12:34와 비교  눅 3:7, 눅 7:33)

예수님은 성전체제에 반대하는 것 처럼 행동했다. 눅 4:1에선 예수님은 요르단의 광야로 가시고 

이전에 요한이 세례를 주던 광야지역이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이 되고

그리고 그는 눅 5:16 (한적한 곳 : 에레모스, 빈들) 광야로 가신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라는 것을 기록하여

누가는 아마도 메시아(예수님)가 그 당시의 성전체제에 반대하여 광야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였다(눅 7:36-50; 15:11-32 ; 23:40-43 ; 눅 5:21-24).

흥미롭게도 눅 5:21-24에서 예수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다니엘 7:13,14에 있는 ’인자’ 를 연결하는 특성을 가진다.

영국의 어떤 신학자는 다니엘 7장은 대제사장의 텍스트이며 

예수님이 이 점을 염두해 두시고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주장했다.

예수님은 사람을 치유한 후 그 치유된 몸을 제사장에게 보여주라고 보낸다.

예수님이 단순히 성전에 치유된 사람들은 보내는 모세의 법을 순종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이미 대제사장의 권세(병 고침을 확인)에 의해 인정된 것을 전달하며 입증하려고 한 것이다.

눅 5:12-15 에서 확실히 도움을 주는 두 가지.

1) 예수님은 정통이 요구하는 법에 절차를 생각하셨다(레 13:2-17, 49 ;  14:2-9).

2)  예수님은 그의 사역이 합법적인 것을 제사장들에게 증명하기 원했다.


그는 제사장직무를 하였고 성전의 성전 제사장들의 허락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성전은 대청소가 필요했고(눅19:45,46), 예수님은 파괴를 예언(눅 21:5-6)하셨다.

그는 성전의 본질이고 당시의 제사장직의 부패로 인한 성전체제를 반대하셨다.


대제사장 데오빌로는 읽는 즉시 이 모든 것을 인식했을 것이다.

누가가 이런 세부사항을 자세하게 언급하는 이유는 

누가의 예수님의 이야기가 오직 대제사장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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