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수10:12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한 이 유명한 사건을 우리는 물리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저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하여 이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할 정도로 심취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기록된 ‘야살의 책’은 역시 시편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것은 여호수아의 기도문입니다.
시편의 저자들처럼 대적을 향한 하나님께 구하는 간구이고 사사기에 나오는
‘드보라의 노래’처럼 예언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이런 기초조차 무시하고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본질적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우주의 질서를 파괴하면서까지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자적 성경 이해로 그런 하나님으로 인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권능, 능력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지나 봅니다.
그것 역시 성경이 말하는 '권능'이 무언지 모르는 소치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종말의 현상인데 하늘과 땅을 다 흔들어 버리고 불로 태우시는
하나님으로 착각합니다.
아버지는 ‘사랑’이시고 가장 큰 관심은 우리의 회개와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아가페의 본질을 추구하지 않는 이들은 외적인 것들로 뒤집어지기를 구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예슈아(예수)’와 동일하고 지금 이것은 ‘아모리 족속’과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당시 가나안을 지배하던 다섯 왕이 연합하여 여호수와와 화친을 한
히위족속을 공격했습니다(수10:3-5).
이것 자체가 가지는 복음적인 의미가 크지만 절제하기로 합니다.
간략하게 나누면 '이방인'에게 아브라함의 언약과 축복,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적하는 죄악입니다.
이것 때문에 사랑의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매매와 장사, 환전을 그토록 심하게
진노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점거한 장소가 '이방인의 뜰'이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여호수아는 진치고 있던 ‘길갈’에서 ‘아얄론 골짜기’까지 달려 가서
이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이 ‘예수님을 예언한 것’(요5:39)이고 그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딤후3:15)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 기초를 잊으면 사람의 계명에 갇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이기에 그것이 우리의 ‘성경 해석의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진정으로 그 기초를 가지고 있다면 이 사건이 달리 보일 것입니다.
이 여호수아의 대적인 왕들의 대표는 ‘예루살렘 왕’ 인 '아도니세덱’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이 사건이 예수님과 당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의 관계가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말이 성경에서 여기 처음 등장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도니세덱’이란 ‘아도니(주, 주권자)’와 ‘쩨데크(의)’의 합성어로 '의의 지도자'란 뜻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자부한 것입니다.
이것은 역시 예수님을 예표하는 ‘살렘 왕’, 멜기세덱(의의 왕)’을 연상하게 합니다.
‘아도니세덱’은 하나님으로 부터가 아닌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등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어떤 분들은 지나친 비약이라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했지만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나오지 않는다"(요5:39,40)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다시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서는 이들을 ‘아모리 족속’이라고 부릅니다.
각기 다른 족속인데 통칭하여 그렇게 부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 찰 때’(창1:16)이루어
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를 보면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마지막 가장 중요한 전쟁이 '아모리'와의 싸움입니다.
아모리를 이겨야 가나안에 가고 가서도 그들의 연합군과 전쟁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누구인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성경의 개념과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아모리’는 ‘아마르’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은 ‘말하다’라는 것입니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은 ‘자기 안에서 나오는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가장 많이, 강하게 책망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들 안에서 나온 사람의 가르침, 계명, 장로들의 유전이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죄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15:3,9-11
우리 안에서 나온 그 말(아마르)가 바로 ‘아모리의 죄악’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방 세력들, 죄악의 구조는 우리 안에 있는 육신에 속한 것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지혜요 본보기(고전10:11)입니다.
이것이 이해되어야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신 것이 무엇인지 열립니다.
성경에서 태양과 달, 별들은 ‘쩨바 하샤마임’, 곧 ‘만군’이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상징합니다.
특별히 창세기 1장의 ‘넷째 날’에 지어진 이 ‘광명체들’은 히브리어로 ‘마오르’라고 하는데
‘오르’,곧 ‘빛(진리)’을 담은 그릇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광야’가 ‘미드바르’, 곧 ‘다바르(말씀)’의 장소 이듯이 말입니다.
이것을 들으면 왜 예언서들과 주님께서 종말의 현상으로 “해가 어두워 지고 달이 핏같이 변하며
하늘의 별들이 떨어진다“고 여러번 말씀하시는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태양이 멈추고 달이 멈추는 것’입니다.
성경 자체의 언어 구조를 배워야 합니다.
여기서 ‘멈추다’가 바로 앞에서 계속 나누었던 ‘잠잠하라’의 ‘다맘’입니다.
이 태양과 달은 실제 하늘의 그것이 아니라 당시 예루살렘 왕을 중심으로 한 ‘아모리 족속’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예언적인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창37:9
이것을 들은 야곱은 그것이 장차 이스라엘이 될 그의 부모와 형제들을 가리키는 것
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성경에서 해와 달, 별은 ‘만군’, 곧 ‘하늘 군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 안에서 나온 말(아마르)로서 ‘분노’와 ‘헛된 일’과 ‘악한 꾀’로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아, 여호수아, 예슈아)’를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계명, 경배의 구조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가르침으로 헛된 경배를 드린다"(마15:9)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눅24:44
이 말씀이 이제 실감 날 것입니다.
제발 문자를 벗어나 진리의 영적 흐름과 구조를 분별하십시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해, 달,별)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성취됩니다.
그것을 ‘멈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말’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종말은 우주가 뒤틀리고 별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 가르침, 헛된 경배가
그치는 것(다맘)입니다.
그런 경배의 시스템이 하나님의 진동, 큰 지진에 의하여 ‘다맘’, 곧 그치고, 멸망하고 잘라지는 것입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중세의 교회가 그랬고 지금 우리가 그 심판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하늘’의 ‘해, 달 ,별들’이 어두워지고 떨어지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이 이루시는데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면 영적인 수건에 가려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말씀에 집중하는 것은 오히려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정말 우리의 일, 말을 그치고 오직 아들에게 ‘입맞춤’(시2:12)을 해야할 때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그 진리, 그 영과 생명(요6:63)을 들을 귀로 듣고 흡수하는 것만이 살 길입니다.
다시 나누지만 시편은 성령이 저자들의 혀에 담아 주신 ‘말씀’(삼하23:2,3)입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이것은 특히 ‘말씀의 구조와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다시 처음 구절로 돌아가 살펴보기 원합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는도다
시편 2:1-3
이 개념 하나만 온전히 정리해도 성경의 많은 구조들을, 특히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하는데
큰 길이 열릴 것입니다.
눈치가 빠른 분들은 이미 나눈 것만으로도 복음서와 계시록의 예수님 말씀들이 여러 갈래로
연결되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영적인 눈치과 감각과 분별이 발달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린 아이같은 진리를 향한 순전함, 나는 무지하다는 심령의 가난함, 낮아짐이 필요합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처럼 무언가 안다고 생각하고 아도니세덱의 영에 머무르면 이미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 스스로 '죄인 중 괴수'라 여기는 이들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이 시편의 내용은 매우 중요한 기초이므로 조금 더 나누고자 합니다.
이 말씀과 동일한 본질이 계시록에 나옵니다.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계11:17,18
시편은 예언적이고 묵시문학적인 성경이 강한데 우리는 그저 감성적으로 이해하고
그런 부분이 있음을 잘 모릅니다.
계시록에 대한 지금 우리의 인식은 매우 오해되는 부분이 많은데 그것은 ‘율법’과 ‘선지서’, ‘시편’의 구조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지 못함에서 옵니다.
그것이 단절된 가운데 해석을 하니 이상한 종말의 물리적 현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단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며 초대교회와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영적인 실제입니다.
특히 시편의 구조는 계시록과 깊은 연결이 됩니다.
이 말씀에서 감사하는 이들은 하늘 보좌 앞에서 경배하는 ‘24장로들’입니다.
이것은 시편의 노래, 구조와 동일한 성령 안에서의 고백입니다.
계시록에는 '새노래들'이 나오는데 그것은 시편의 노래와 같습니다.
그들은 시편 저자들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의인들의 상징입니다.
왜 감사하냐면 옛적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이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11장은 예루살렘 성전을 측량하고 ‘기름부음 받은 두 증인’과 ‘큰 지진’으로 성을 무너 뜨리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왕노릇, 곧 그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인 우리의 ‘옛사람의 구조’를 무너 뜨리시는, 이전 것이 지나고 '새 것'이 되는 재창조와 같습니다.
역사적 현실로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것(마24:1-4)의 성취지만 우리의 영적인 실존을 다룬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심판의 대상이 먼저 전능자에게 ‘분노’하는 ‘이방’(계11:18)입니다.
눈이 번쩍 뜨여지시나요?
이것은 시2편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분노’하는 ‘이방나라’와 동일합니다.
히브리어로는 ‘고임’이고 헬라어로는 동일한 개념의 ‘에드노스’를 쓰고 있습니다.
'분노'역시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동일한 '라가쉬'와 '올게'입니다.
우리는 계시록을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이방 나라가 분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의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