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

계대혼인에 대한 규례 (3) - 기업무를 자(고엘)

  • 김동훈
  • 조회 7754
  • 2016.06.27 14:52

 

 

(3)



보아스와 룻


 

유다와 다말, 보아스와 룻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아주 핵심적인 인물들이고

그들의 족보가 이어지는 것이 바로 이 계대혼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계대혼인에 대한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과

아주 중요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잇는 것에 대한 중요한 원리들이 담겨있다.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에서 유다의 아들 오난은

그 형제의 이름 잇기를 싫어했고

그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악이 무엇인지 불의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 6:9-10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에 대한 그림을 가지고 있고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의가 무엇이고

불의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자이다.

보아스는 룻과 나오미의 가계에 ‘기업무를 자’로서

형제의 의무를 가진 자로 등장하는데

‘기업 무를 자’라는 단어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담고 있는 단어이다.

히브리어로 ‘고엘’이라는 단어로 '속량하다', '구속하다', '친족의 역할을 행하다', 

(몸값을 치르고)도로찾다 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가알'의 현재능동분사로 

‘구속자’, ‘친족의 의무를 행하는 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내가 이방 나라들의 젖을 빨며 뭇 왕의 젖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고엘/גאל),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사 60:16


대저 그들의 구속자(고엘/גאל)는 강하시니

그가 너를 대적하여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잠 23:11

'고엘(גאל)'은 피값을 주고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신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신약에서 고엘은 ‘아폴뤼트로시스(ἀπολύτρωσις)’라는 헬라어로 번역되었는데

'잃어버린 권리를 대신하여 찾아주는 자', '구속자'로 쓰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고엘/גאל)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하신 기업의 약속

얻게 하려 하심이라

히 9:15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고엘/גאל)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엡 1:7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고엘/גא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4


신약에서 이 단어는 속량을 의미하며

이것은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

죄사함, 의롭다 하심을 통하여

기업의 약속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고엘(기업무름)은 아담의 타락으로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의 그림자이다.


그러나 유다와 유다의 아들들은

마치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등한시 여긴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유업에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유다 개인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자손을 통해

메시아가 나오게 된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잇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업신 여기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다.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유업보다는 자기 개인의 육적인 손해를 염려해

하나님의 언약과 유업을 소홀히 여기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하니

그 기업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룻 4:5-6



보아스도 기업물어야 할 책임을 가진 자지만

그 보다 먼저 기업 무를 의무를 가진 자는

자신에게 손해가 있을까 하여 그 의무를 행하지 않았다.

이것은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씨를 주지 않고 땅에 설정한 것과 동일한 구조임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보아스는

적극적으로 기업무를 자의 책임을 이행하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룻 3:13


보아스는 비록 자기에게 손해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법과 말씀을 지키는 자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성경에 ‘유력한 자’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유력한 자’는 히브리어로 ‘이쉬 깁보르 하일’인데

‘이쉬’는 남자(사람), ‘깁보르’는 강한, 전능한, 능력, 용사라는 의미이고

‘하일’은 힘, 권능, 덕, 공의를 의미하므로 ‘강한 능력을 가진 남자’,

곧 ‘성령의 권능을 가진 자’를 의미한다.

보아스는 성령의 권능을 가진 자를 예표하고 있으며

성령의 권능을 가진 자가 어떠한 자인지를 보여준다.

성령의 권능이라고 하면 어떤 대단한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성령님의 본질은 진리의 영이시고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선하시고 기쁘신 뜻대로 행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보아스는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은 두 과부를 외면하지 않고

특히 젊은 자를 따르지 않고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현숙한 여인을

아내로 맞는 것을 기뻐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규례는 자기에게 손해가 있을까하여

생각하고 계산하고 마다해야 할 것이 아니라

즐거워하며, 갈망하며, 기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잇는 자들이다.


성경은 만일 그 사랆이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라고 말해야 하고

그의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신25:7-10
 


룻기에도 이 말씀과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지만 동일한 구조가 등장한다.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룻 3:7-8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