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4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계대혼인에 관한 규례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담고 있다.
이 규례는 특히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복음이 담겨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구약과 신약 모두
그 수건을 벗기면, 그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나는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관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부활에 대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부분이 있지만
온전히 깨닫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온전히 깨닫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가능하며
이 ‘온전함’을 가져야 ‘진정한 부활’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고후 3:16
예수님 당시에 ‘죽은 자의 부활’이란 주제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있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4
마르다가 갖고 있던 부활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갖고 있는 부활의 관점과 비슷하다.
우리도 마지막 부활 때에, 이 다음에 죽어서 천국에서
부활의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날 줄을 알고 있다.
사두개인들도 그렇고 바리새인들도 부활에 대해 논쟁할 때
마지막 날에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사후에 ‘죽은 육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에 대해서 가르치실 때
죽은 우리의 육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으시다.
다만 예수님 자신이 곧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가 부활과 영생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이 말씀을 우리는 믿는 자들에게 나중에 언젠가 될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부활 때가 아니라 지금 죽어 있는 나사로를 살리신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주제를 생각할 때
많은 이들은 죽은 육신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고
어떠한 모습으로 부활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소마)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소마)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고전 15:35-37
바울은 이 질문을 하는 자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부활의 의미에서 포커스가 빗나갔기 때문이다.
앞에 ‘형체’와 ‘몸’이란 단어는 둘다 ‘소마’라는 동일한 헬라어이다.
많은 이들은 부활에 대해 논할 때 ‘죽을 몸(소마)’에 대해 관심을 갖지만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은 우리의 ‘죽을 몸(소마)’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 ‘부활의 요점’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전 15:49-50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고전 15-39-42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은 우리의 육신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에 초점이 있다.
우리는 미래에 육신이 죽은 후, 부활하는 것을 많이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를 믿을 때 우리의 영이 즉시 부활한다는 것이다.
그 분의 말씀을 믿고 그 분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우리는 부활한다.
이 부활에 대한 관점이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오라비인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죽은 나사로의 육신을 살린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 죽은 자의 영적인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고 계신다.
먼저 예수님은 무덤의 돌을 옮기라고 명하신다.
이것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우리 마음에 돌과 같은 것을 제거해야 함을 의미한다.
‘무덤의 돌’은 ‘음부(스올)의 문’, 우리를 옥에 가두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먼저 옮기고 제거해야 한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겔 11:9
이것이 바로 돌을 옮기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큰 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신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3
나오라라는 단어의 ‘듀로’라는 단어와 ‘엑소’라는 단어가 쓰였다.
‘듀로’는 ‘(여기까지)오라’라는 의미이고
대부분 예수님께로 나아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엑소’라는 단어는 ‘문 밖에’, ‘밖으로’라는 뜻이다.
이것은 무덤 안에 있는 자들이 주의 음성을 듣고
무덤의 문을 열고 문 밖으로 나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 5:25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은 성경에 매우 중요한 용어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이 ‘큰 음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큰 소리’는 원어로 ‘큰 음성’과도 같다.
제자들이 왜 이런 것을 기록하냐면 이 ‘큰 음성’이라는 용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언약을 세우실 때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에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신 5:22
이 ‘큰 음성’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총회에 선포하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모든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음성을 듣지 못하고 죽을까하여 하나님께 구하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모든 말씀을 두 돌판에 새겨 주셨고
또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고
그의 말을 들을 것을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신 18:18
왜 이런 것을 기록하냐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큰 음성으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본질로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을 큰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시기 때문이다.
나사로는 문 밖에서서 두드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 예수님의 큰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밖으로 나왔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부활은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래야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와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게 된다.
나사로의 이런 사건들 하나하나가 부활의 본질에 대한 그림들을 담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행하심은 둘러싼 무리들이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것이라는 기록은 이것을 뒷받침 한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을 때
그는 수족이 베로 동인채로 나왔고
그의 얼굴은 수건에 싸여있다고 말한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요 11:43-44
이런 것 하나하나가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다.
그의 얼굴이 수건에 쌓여있다는 것은 죽음에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5
바울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은 것을
‘율법 조문’이라 말하고 ‘죽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율법 조문’이란 ‘모세의 글’ 자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에 덮여 있는 상태를
율법 조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후 3:6
율법 조문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 그 마음이 수건에 덮여있는 상태이고
영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 수건이 벗겨진 상태를 말하고 ‘살리는 것’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3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가르침)이 곧, ‘영’이고 ‘생명’이다.
그 가르침을 받을 때 모세의 글을 읽을 때 수건이 벗겨지게 되고
자유함을 얻게 된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6-18
이것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말하는 부활의 개념이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것.
나사로의 부활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모델이다.
그의 얼굴에 수건을 벗게 한 것은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예언적 행위이다.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 25:7-8
‘죽은 자의 부활’과 관련해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바울과 요한이 중요하게 다루는 부활에 대한 개념이다.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 15:25-26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고전 15:51-54
‘나팔 소리’는 ‘나팔 소리와 같은 큰 음성’
시내산에서 여호와의 큰 음성과 같은 예수님의 큰 음성(소리)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 20:14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눅 20:36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 2:14-15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딤후 1:10-11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폐하여졌다.
왜냐하면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썩지 아니할 씨, 예수님의 말씀, 영원한 복음...
그리고 이 복음이 선포되고 나눠지고 행해질 때
죽은 자들이 부활에 이르게 된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장 중요한 관점 중 하나는
사망이 폐하여 지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이 ‘사망’에 대해서 중요한 관점을 이야기 한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일 3:14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 3:15
우리 안에 다시는 죽음(사망)이 없는 부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게 된다.
계대혼인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죽은 형제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형제 사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 형제 사랑을 이루신 분이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3:16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 사망 안에 머물러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만의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이방인들을 미워하고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원수된 것(사망),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서로 화목하게 하셔서
이 둘이 한 성령 안에서 한 근원, 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6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엡 2:18-19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행하신 형제 사랑이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엡 3:6
그들은 육체로는 이방인, 무할례자,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 2:11-13
이것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 부활과도 같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오순절 성령님이 임하신 것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이 하나님의 상속자, 약속에 참여하는 자,
유대인과 한 형제가 되는 것은 그들에게 가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엡 3:8-11
바울은 이 비밀의 경륜이 바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된 교회이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간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된 교회가 아닌 이방인들만의 교회 시대이다.
주님의 형제들(교회) 안에 유대인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빠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진리로 하나된 교회 안에는 유대인 형제들 가운데 남은자들이 들어와야 한다.
이 교회의 그림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이 교회, 형제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히 2:9-16
물론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오직 약속의 씨를 가진 자라야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진정한 이스라엘이 된다.
바울에게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형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
‘예배’와 ‘약속’들이 있었고 육신적으로 하면 그리스도도 그들 가운데 나셨지만
지금 그들은 죽음 가운데 있고 그들에게 약속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의 씨가 없어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3-8
바울은 자신의 형제, 골육의 친척이 시기나게 하여
그들이 구원 얻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또 다른 하나님의 경륜, 신비를 이야기 한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또 다시 이방인들이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신비를 모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이방인 교회)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25-27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말한다.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넘어짐은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롬 11:11-12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말하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하거나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게 하셨는데
하물며 그들이 충만하게 되는 것은 어떻겠냐고 반문한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었는데
다시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
곧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롬 11:15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다.
누가 이 주의 마음을 알고 주의 모사가 되겠느냐고 바울은 말한다.
그리고 유대인 형제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은
에스겔 37장에도 예언되어 있듯이 마지막 부활 때에 이루어질 일이다.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 37:9-14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대해 말하면서
부활이 차례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 15:22-26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의 부활 - 초실절
부활은 열매 맺는 것이다.
그 다음은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의 부활이다.
그가 강림하실 때는 오순절을 말한다.
오순절은 맥추절이라고도 하고 초실절이기도 하다(출23:16).
(이스라엘은 초실절이 보리와 밀의 초실절이 두 차례 있고 초실절은 부활을 의미한다/고전15:20)
오순절에 부활이 일어났다는 것은 생소하게 들릴 수 있으나
오순절은 예수님의 영,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에게
강림하셔서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진정한 부활이 일어난 것이다.
바울은 분명히 오순절을 두 번째 부활로 말하고 있다.
오순절/맥추절에 드리는 열매는 바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도들과 제자들을 의미한다.
(이 부활의 차례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영적인 원리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이다. 이 때는 초막절을 의미한다.
이 때는 추수 때인데 추수 때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여
가라지를 불에 태우고 알곡만 곶간에 들이며 마귀를 멸하는 때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멸망 받을 원수, 곧 사망을 멸하시는 때이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고전 15:52-54
이것은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그 나팔 소리... 예수님의 큰 음성을 듣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며
마상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진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25장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 25:8
이것은 계시록에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과 같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 7:17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이것은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하신 말씀과도 연관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 7:37-39
성령께서 임하시고 그의 인도함을 받는 것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 사망을 멸하시는 것과
아주 중요한 관계가 있다.
바울은 ‘이사야 25장’의 말씀과 동시에 ‘호세아 13장’의 말씀을 인용한다.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
그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
그의 근원이 마르며 그의 샘이 마르고
그 쌓아 둔 바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로다
호 13:14-15
이것은 패역한 이스라엘, 스올의 권세에 갇힌 그들을
사망에서 구속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동풍,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
성령의 바람으로 그 근원을 말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 바람을 보내시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사 40:6-8
바로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서게 하기 위함이다.
바울이 인용한 호세아 13장과 이어진 14장 2절은
사망에 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전략이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호 14:1-3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하지 않아 이방인이 긍휼을 얻은 것처럼
그들(이스라엘 백성)도 이방인들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처럼
긍휼을 얻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 11:30-31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 뿐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예수님은 죽음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먼저 사랑하셔서 생명을 얻게 하시고
사망을 멸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먼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 4:21).
또한 우리도 죽은 남편의 형제로서 그의 형제된 의무로
그의 씨(말씀)를 아내된 교회에 전하여 그의 이름으로 유업을 얻게 하여
우리의 형제이신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또 우리 안에 사망이 없는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유대인 형제들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의 중요한 언약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씨가 없이 끊어진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잇게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형제를 사랑하라는 중요한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일 4:21
예수님은 형제와 화목하는 것을 강조하셨고
특히 예물을 드릴 때에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거든
화목하고 와서 예물을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이 두 계명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고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때에 드리는 예물은 이스라엘의 삼대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드릴 때의 예물을 말한다.
우리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진정한 예배 진정한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는
이 유대인 형제들 가운데 남은자들과의 화목함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 13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