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

'완전한 진리의 여정'-시편연구-3

  • 김우현
  • 조회 3542
  • 2016.08.30 13:55

3.

 

 

 

 

 

 

모든 말씀이 그렇지만 시편 역시 그 배경과 기초적인 지식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지식이 없이 각자 취향과 영적인 도움과 위로가 되는 것을 취해서

유익을 얻는 편입니다.

시편은 그냥 계시로 한번에 되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과 공간을 거쳐서

믿음의 의인들에 의해서 편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영감으로 지은 수많은 시들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오직 아버지의 얼굴과 진리를 추구했던 그들의  성령 안에서

드린 기도, 찬양, 고백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시편은 그런 것들 중에서 편집자들이 의도적으로 취하고 분류하고 편집한 것입니다.

가장 많은 것은 다윗의 시지만 모세의 시도 있고 솔로몬, 아삽, 고라, 무명 시인들의 

시도 많습니다.

아마 모세의 시는 출애굽 여정 가운데 기록 되었고 계속 전승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주로 '기도'의 형태를 가집니다.

모세가 처했던 상황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패역했던 광야의 시간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그의 시를 연구할 때는 광야의 사건들,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황이라는 배경을 

깊이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윗은 너무나 당연하구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이 시들을 여러 시대에 걸쳐 편집되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많은 시들의 문서들을 망라해서 누군가가 편집한 것인데 무작정 한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감동으로, 지혜 가운데 '의도적인 편집'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무조건 하늘에서 부어지고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 안에서 믿음의 의인들이 '원소스들(original sources)'을 그 시대의 

영적 상황을 배경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50편이나 되는 이 시편들을 누가 왜 편집한 것일까요? 

우리가 본격적으로 시편의 비밀 가운데 들어 가기 전에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자의 의도도 모른 채 해석을 하는 것은 어린 아이 수준이고 아전인수가 되기 쉽습니다.

시편은 한권의 책이 아니라 5권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토라(모세 오경)'처럼 다섯 권으로 의도적으로 분류한 것입니다. 

실제로 시편은 토라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 다섯권은 토라와 영적인 본질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편의 편집자들은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연구하면 할수록 깨닫게 됩니다.

먼저 히브리 성경에서 시편이 위치하는 부분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구약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39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본래 '히브리 성경의 순서'를 따른 것이 아닙니다.

‘70인역’이라는 기원전 3세기 중엽에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의 배열을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성경의 순서가 아닌 이 '칠십인역'의 배열을 취했는데 아무래도 초대교회가

로마 제국으로 확산되면서 유대적인, 히브리적인 뿌리와 단절하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성경 배열은 매우 헬라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을 이해하려면 원래 히브리 성경, 구약의 순서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성경의 순서를 정한 것에 영적인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존하는 히브리 성경의 순서를 편집하고 배치한 대표적 인물을 유대인들은 

‘에스라’로 생각합니다.

그와 함께 120여명의 지혜로운 현인들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 회개하는 영으로

성경을 재정립하고 ‘토라 포션’과 같은 연구의 구조들을 만들어 냈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작업에 성령이 함께 했다고 합니다.

저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스9:4

 

여기 이스라엘의 죄를 통한히 여기는 ‘말씀으로 인해 떠는 자들(하레드)’이 

에스라와 함께 새롭게 성경을 정립한 그룹의 힌트 일 수가 있습니다.

후에 이들에게서 '바리새파'가 나옵니다.

선지서를 면밀히 연구하면 성전의 회복은 ‘말씀의 회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것을 수없이 말씀하셨지만 유대인들도 우리도 그것을

깊이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에스라나 깨어 있는 의인들은 그 말씀을 듣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바로 성경을 다시 재정립하고 연구하고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정립한 히브리 성경의 구조가 지금 히브리성경의 순서입니다.

여기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믿음의 의인들의 깊은 회개와 영적인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 순서는 먼저 ‘모세 오경’, 다음으로 ‘예언서’인데 그것은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나누어 집니다. 

전기 예언서는 뜻밖에도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가 들어 갑니다. 

이 히브리인들은 우리와 달리 그 성경이 '예언적인 기록'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서 사무엘이나 열왕기가 상,하로 나누어졌지만 그것은 70인역의 구분일 뿐입니다. 

히브리 성경은 사무엘, 열왕기가 각각 한 권씩으로 되어 있습니다. 

70인역은 아마도 분량이 많아서 그것을 구별한 것인 것 같은데 그런 편리주의 실용주의가

헬라의 대표적인 개념입니다.

지금 우리의 성경에 나누어져 있는 장과 절 역시 후대에 되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편리한 부분이 있으나 말씀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단절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래 영적으로 이어져 있는 말씀을 사람의 의도로 구분하여 다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장성한 자들은 이런 부분에 눈을 떠야 하고 외적인 구조들에 이해서 진리의 생수가

막히는 것에 대해 분별하는 감각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의 진리, 그 뜻을 아는 것에는 아주 예민하고 진지하고 심각한 '하이쉬'들이 되어야 합니다.

'후기 예언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12개 '소선지서'가 포함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시편'이 나옵니다.

시편은 율법, 예언서 다음에 위치합니다. 

이런 흐름을 주목하십시오.

여기에 욥기나 잠언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역사서'인데 '에스라서'와 '느헤미야'가 한권으로 되어있고

뜻밖에도 '다니엘'이 거기 포함됩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역대기'가 한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현인들은 이런 순서를 따라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 진정한

'바벨론의 회복', '새 예루살렘의 회복'으로 의도했을 수 있습니다.

모세의 토라(율법)은 하나님의 법, 의를 다룹니다. 

그것을 온전히 깨닫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이 ‘죄(불법)’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이라는 우상과 흑암의 지경에 포로로 사로잡혀간 것은

바로 이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앞에서 ‘예언서’인 사무엘, 열왕기, 그리고 선지서들이 있는데 

모두 ‘이스라엘의 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 하나님의 법, 율법을 깨닫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 '불법'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시편 역시 처음부터 이 부분을 강하게 강조하고 끝까지 경고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1-2

 

이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바로 율법을 알지 못하는 '불법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들의 길은 외적으로 경건의 모양과 열심을 갖추어도  '알지 못한다(인전하지 않음)'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역시 바벨론 포로 이후 깊고 치열한 회개의 영을 가진 의인들에 의하여 편집의

과정을 거쳤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진정한 의인들이, 여호와의 집, 성소, 진리의 물가에 선 나무들임을 처음부터 강조합니다.

시편은 전체가 바로 그런 의인들의 치열한 삶의 간구를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인 배경을 간과하기에 시편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감성적인 접근을 주로 해왔던 것입니다.

시편의 주제는 두렵고 떨림으로 ‘여호와의 율법으로 사는 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을 '토라'처럼 '다섯권'으로 분리한 것입니다.

시편을 토라와 깊이 연관하여 연구하지 않으면 본질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율법에 대한 깊은 지식, 순종이 있어야 다시는 이방에 포로로 끌려 가지 않는다는 

회개와 통회의 영이 시편을 그런 위치에 배열한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 성경의 마지막은 역대기입니다.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셈, 함과 야벳은 조상들이라

역대상 1:1

 

역대기의 시작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되는 족보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창조의 근원적인 회복, '에덴의 회복'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에덴의 회복이 진정한 '새 예루살렘'의 완성입니다.

여기에 ‘가인’과 같은 범죄한 자의 족보는 나오지 않습니다.

특이한 것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에서는 이스라엘의 범죄의 근원에 다윗과 솔로몬을

포함시킵니다.

그들의 죄가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고 성전을 건축하지만 결국 이방에

사로잡혀가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역대기에는 특이하게도 그들의 죄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가져 오려는 다윗의 열정을

아주 자세히 기록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 파수꾼, 찬양하는 예배자들을 재정하고 세웁니다.

성전에 있는 자들, 예배의 회복, 보수하고 파수하는 자들의 회복. 그리고 나서 언약궤를

시온으로 가져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언약궤와 제사장, 성전에서 섬기는 종들이 없이는 ‘하나님의 성소’, 곧 ‘성전’을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다윗이 유지를 받들어 성전을 건축하는 열심과 과정을 아주 자세히

다룹니다.

그리고 역대기의, 히브리성경의 마지막 구절을 보십시오.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역대하 36:23

 

이것이 역대기의 마지막 내용입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비전을 마지막으로 기록함으로 성경을 읽는

본질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전의 회복'입니다.

역대기의 시작인 에덴의 아담의 족보, 첫 창조와 마지막 완성이 곧 '새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소'가 되는 것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 구약 성경 전체의 아버지가 보여주신 그림과도 같습니다.

계시록의 마지막 비전도 ‘새 하늘과 새 땅’이고 ‘새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입니다.

그런데 왜 역대기 기자들은 다윗이나 솔로몬의 죄를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바로 그 앞에 나오는  ‘시편’이 그 답입니다.

시편은 바로 사무엘, 열왕기에서 보여지는 이스라엘의 불법과 죄에 대한 ‘회개의 본질'입니다.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의 위치에서 ‘여호와의 율법’을 깊이 깨닫고 순종함으로

온전히 의의 길을 걷는 회복의 여정을 다은 것이 바로 시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의 편집자들은 시편을 그 중심에 배치한 것입니다.

시편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성전으로 건축되는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이 배경을 가지고 시편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때,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성소'에서

찬양하는 거룩한 의인들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 3:16,17

 

그래서 시편의 기자들은 한결 같이 ‘성전’을 사모하고 거기에 거하기를 심령이

쇠하기까지 사모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편의 본질을 알 때 진정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는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다윗을 중심으로 한 시편의 주인공들은 거의 죄, 환난,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회개하는 자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 진리 안에 거할 때만이 그것을 이기는 자들이 됨을

처절하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시편을 통해 그것을 깨닫고 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