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마4:23-25
본격적인 예수님의 공생애의 사역을 기록한 마태의 이 기록은
지금까지 나누었던 영적인 의미들을 압축하여 증거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역은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듯이 이스라엘 땅에 국한 된 것이 아니었다.
‘온 수리아’와 데가볼리‘,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의 수많은 무리들이
주님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냥 주님께서 이렇게 많은 곳에서 사역을 하셨다는 단순한 증거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제자들은 그냥 단순히 성경을 쓰지 않았다.
이 지명들은 하나님의 언약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 이방의 땅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이 살던 곳이다.
처음 이스라엘 땅에 밟을 디딜 때에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이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곳이다.
헬라어로 ‘에레모스’, 곧 ‘빈들’, ‘한적한 곳‘이라고 기록된 그곳에 가게
해달라고 무던히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갈릴리에 세 번째 갔을 때에 가이드를 하던 후배 진상 형제가
이스라엘 지도에서 ’에레모스 산‘이 있음을 발견하고 알려 주었다.
정말 나버나훔의 뒤쪽 산 이름이 ’에레모스‘였다.
그곳에 처음 올랐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느껴지는 듯 하다.
주님께서 오직 아버지의 얼굴만 구하고 기도하시던 곳, 제자들을 부르시던
그 아늑한 산에 오르자 갈릴리가 한 눈에 들어 왔다.
날씨조차 너무나 평온하고 화창하던 날이었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갈릴리가 압도하듯이 다가와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예수님도 행로에 지치셨을 때, 이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휴식을 취하셨겠구나
생각하자 그냥 감사하기도 했다.
‘가서 제자 삼으라’는 찬양을 부르며 다시 제자로 살기를 뜨겁게 기도했다.
영상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예수님의 여정을 깊이 깨닫고 그것을 나누기를 갈망했다.
“주님의 길을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성령님...주님의 걸으신 하늘 풍경의 본질로 저를 데려가 주세요”
라고 마음과 뜻을 다해서 간구했다.
정말 나는 다른 욕심이 없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세상에서 가장 많이
소유하고 싶었다.
‘에레모스’는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요 ‘겨자씨’같은 ‘천국의 어린’아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막6:45,46
이 기사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일어난 것이다.
왜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건 이후에 오히려 제자들을 강권하셔서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신 것일까?
아무래도 놀라운 기적을 본 사람들의 반응에 제자들이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리라.
요한은 이것을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5)라고 했다.
나는 처음에 이것이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먼저 였다.
그런데 왜 그들이 ‘임금’, 고 ‘그리스도’로 삼으려 하자 억지로 에레모스에
도망하셨는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시려는 것을 기피하신 주님의 마음을
지금은 이해한다.
비밀은 바로 ‘건너 편’이라는 말에 있다.
나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산, 에레모스에서 이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
그 산에 오르면 갈릴리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데 주께서 말씀하시는 ‘건너 편’과
‘저 편’ 그리고 ‘이 편’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갈릴리의 지형적인 특징이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건너간 곳은 ‘거라사’와 ‘가다라’ 지방이다.
그것은 당시의 ‘데가볼리’로 가는 입구였다.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건너편은 헬라에 의해 건설 된 ‘10개의 도시들(데가볼리)’로
가는 길목이었다.
나는 그 당시의 항구 터였던 거리사, 가다라 등지를 수없이 찾아가 흔적들을
조사하였다.
현재의 성서지도를 보면 거라사나 가다라가 갈릴리에서 수십 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그러나 그 도시로 들어가는 항구는 바로 ‘건너 편’지경이었다.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막5:1,2
마가는 예수님이 ‘건너 편’ 거라사 땅에 갔을 때, 배에서 나오시자 ‘곧’
귀신들린 자가 무덤에서 나왔다고 했다.
예수님은 이 광인을 고치시고 그 안에 있는 ‘군대’라는 이름의 귀신을
돼지 떼 속에 들어가게 하셨다.
그리고 돼지 떼 2천 마리가 바다(갈릴리)에 들어가 몰사했다.
나는 ‘곧’이라는 말씀을 주목하였다.
우리는 성경의 작은 기록하나라도 중요시 여기고 주목하는 체질을 익혀야 한다.
서구의 지성주의자로 자체하던 이들이 세속의 사상과 문화적 영향 아래서
성경의 권위를 함부로 무시하다가 결국 지금의 몰락을 겪게 된 것이다.
그냥 무조건 성경 지상주의를 말하는것이 아니라 이것이 성령의 영감 가운데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을 깊이 깨닫지 못하면 모래위에 집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읽는 것도
문제다.
이 안에 감추인 하나님의 비밀, 아버지의 마음과 뜻, 주님의 길을 알고자
오히려 나를 부인하고 그것에 순종하지 않으면 동시에 무너지게 된다.
지금 일반적으로 알려진 거라사의 지도는 갈릴리에서 매우 먼 거리다.
그러나 나는 주님께서 배에서 내리자 ‘곧’ 그곳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다는
기록을 신뢰했다.
그래서 성경을 근거로 거라사 항구 터 주변을 계속 찾고 뒤졌다.
그런데 바로 그 항구터 뒤편 산위에 최근 발굴되는 엄청난 규모의 로마시대
유적을 발견하였다.
놀랍게도 그것은 아주 최근 발굴되는 것이어서 성서학자들은 이 정보를 알지 못했다.
그곳은 바로 갈릴리가 비탈처럼 내려다보이는 높은 호수 주변의 산위에 있던
로마시대 도시였다.
아직 발굴이 끝나지 않은 그곳에서 촬영하며 나는 성경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깨달았다.
이곳은 로마의 신전터와 군대가 주둔한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비잔틴 시대의 교회 터까지 나타났다.
이곳 역시 당시에는 ‘거라사’의 지경 안에 들어 가는 것이었다.
매우 엄청난 규모로 갈릴리 바로 가까이 ‘고대 거라사’를 알려주는 것이다.
누가의 기록은 정확했다.
이런 것을 충분히 탐구하지 않은 학자들이 함부로 성경이 틀렸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리로 올라가는 산의 지형들을 살피니 여러 자연 동굴로 된 무덤들이 보였다.
복음서는 모두 거라사의 광인이 항구에서 가까운 ‘무덤 사이에 거한다’고 했다.
자료에 의하면 로마의 두려운 ‘10군단’이 이 지역에 주둔했다고 한다.
그래서 ‘군대’라는 이름의 악한 영들이 그 사람에게 임한 것이다.
많은 그리고 그들이 ‘돼지고기’를 먹었고 신전에 바쳤기에 그 많은 돼지들을
키운 것이다.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막5:9-12
나는 고대 거라사의 현장들을 조사하고 촬영하면서 이 기록들이 매우 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솔직히 이전에는 어떻게 갈릴리 주변에 수천 마리의 돼지 떼가 있고
그것이 바다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의문이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키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장을 밟으며 그것이 충분히 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로마의 엄청난 군대와 돼지 떼, 그리고 신전 터는 이 ‘건녀 편’이 ‘이방인들의 땅’임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이 군대 귀신이 들려 무덤사이에 거하는 자는 이방의 짐승들에
, 음부(스올, 무덤)에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이 ‘먼 나라’, 곧 이방에 가서 ‘돼지 떼’를
키우는 것(눅15:15).이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는 그들이 돌아오기를 항상 기다리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건너 편’으로 가신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이방에 흩어진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렘31:20)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마음, 언약을 가지고 그리로 가신 것이다.
당시 건너 편 ‘거라사’, 가다라‘ 지역은 ’데가볼리‘(마4:25), 곧 에브라임이
흩어져 살던 이방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고 범죄 하여 이미 앗수르 시대부터 갈릴리에서
이방에 끌려가 오랫동안 살고 있었다.
호세아는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이방인들이 그의 힘을 삼켰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무성할지라도
알지 못하는도다“(호7:8,9)라고 대언하였다.
정말 북이스라엘 10지파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갈릴리 건너편’의 ‘온 수리아 땅’,
‘데가볼리’지역에 혼합되어 살았다.
그러나 정말 말씀 그대로 이방의 짐승들의 힘에 삼켜진 것이다.
처음에는 ‘앗수르(수리아)’가 삼켰고 그 후에는 ‘헬라’가 지배했고 그 다음 ‘로마’의
지배하에 신음하고 하고 있었다.
성경은 이들을 모두 ‘짐승들’이라고 표현한다.
그랗게 사나운 짐승들에 물려간 ‘잃어버린 양떼’들이 백발이 되듯이
오래 되어도 누구 하나 찾는 이가 없었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겔34:5,6,11,12
나는 이 예언을 읽으며 참 많이도 울었다.
예루살렘의 화려한 성전의 예배에 집중된 이들도, 이스라엘의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이들을 아버지는 이토록 애타게 찾고 계셨던 것이다.
바로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는 이것을 알려 주시는 것이다.
그것의 주인공은 탕자가 아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 이방에 돼지고기를 치고 사는 탕자를 찾고 기다리시는
하늘의 사랑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뜨거운 언약을 붙들고 건너편으로 가셔서 ‘무덤’에 사이에서
귀신들 사로잡힌 자를 구하셨다.
이사야는 이방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을 가리켜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밤을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으며”(사65:4)라고 예언했다.
거라사의 광인을 치유하시는 것은 바로 이 예언의 성취이다.
‘무덤’은 이방의 지배에서 그들의 영적인 죽음을, ‘은밀한 처소’는 우상의 제사,
‘돼지고기’는 가증한 제물을 먹는 부정함을 상징한다.
에스겔, 예레미야 등 무수한 이들이 이것을 이스라엘이 이방에서 겪는 ‘환난’으로
예언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자신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유대인들을 물리치고
‘건너편’으로 가신 이유가 그것이다.
주님은 먼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갈릴리 시역을 보면 이 성경에 언약된 뜻을 치열하게 순종하시려는
영적 긴장을 느껴진다.
갈릴리에서 ‘이 편’은 ‘가버나훔’, ‘디베랴’등의 유대 지역이다.
주님은 그들 역시 치유하시고 천국복음으로 가르치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은 ‘건너 편’으로 상징이 되는 ‘이방에 흩어진 백성들’을
찾고 찾는 것이고 더 나아가 ‘열방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