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요4:5,6
예수님은 남들이 잘 다니지 않는 ‘사마리아의 길’을 다시 이용하셨다.
잘 알려진대로 당시 유대인들은 거의 그 길로 다니지 않았다.
이방에 끌려가 혼잡 되어버린 에브라임(북이스라엘)을 원수처럼 여기고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길로 가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인간적인 마음이 아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진리’(요16:13), 곧 ‘언약’가운데로 이끄신 것이다.
앞에서도 나누었지만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여정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그 안에 깊은 하늘의 비밀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살아가신 삶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1:14)라고 기록했다.
이것은 태초부터 있던 ‘하나님의 생명’이 인자로 오신 예수님 안에 거하신다는
의미이다.
‘거한다’는 말은 ‘스케노오’ 곧 ‘장막을 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여정 안에 하나님께서 ‘빛’과 ‘영광’으로 임재하신 것이다.
그래서 특히 요한의 복음서를 읽을 때에 ‘시간과 장소’, ‘사람과 사건’하나 하나를
주의 하여 깊이 읽으려 해야 한다.
이 영광스러운 주님의 길을 세심히 읽어내지 못하면 우리가 가진 진리는
너무나 협소하고 개인적인 적용꺼리로 둔갑한다.
바울은 우리가 놓친 교회의 사명을 말하고 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엡3:10-12
교회는 태초부터 하나님의 감추인 비밀, 하늘의 여러 가지 ‘지혜’를
발견하여 세상에 알리는 사명을 부여 받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 깊은 집중력을 보이지 않았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들어가신 시간과 장소를 아주 세심하게 기록했다.
‘수가라는 동네’, ‘야곱의 우물’, ‘요셉에게 준 땅’, ‘여섯시’는 매우 중요한 언약적인
개념들이다.
‘수가’는 ‘쉬카르’라는 말인데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나환자’를 ‘이방인’(눅17:18)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계19:10)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예언적인 구조’라는 것이다.
2천 년 전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께서 영을 부여하셔서
말세를 당한 우리를 위한 전략과 길들을 계시하신 것이다.
수가에서의 일을 ‘마지막 때’의 교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땅은 요셉에게 기업으로 준 땅인데 그는 이방에 가서 신부를 얻고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얻었다.
요셉은 성경에서 대표적인 ‘메시아의 모형’이다.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은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만이 아니다.
‘요셉의 자손’으로도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그것은 요셉이 다윗만큼이나 중요한 ‘예표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이방으로 가는 메시아이다.
예수님의 사마리아의 여정은 마지막 때 교회에 대한 깊은 예언을 나타낸다.
그것을 더욱 확증하는 것이 바로 ‘여섯시’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 시간은 ‘정오 즈음’이다.
유대의 시간으로 계산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마태나 다른 복음서들은 ‘유대의 시간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당시 로마에 흩어진 성도들에게 그들이 사용하는 시간으로
복음서를 쓰고 있다.
요한복음을 읽으면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유대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임을
알게 된다.
바로 앞에서도 그는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다”(요2:13)고 기록했다.
만일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유대인이라면 ‘유월절’이 자기들의 절기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요한은 이것을 여러 번 반복하여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요5:1)라고
친절히 설명한다.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은 계시록처럼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은 이런 시간개념을 단순히 정보를 주기 위하여만 기록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요1:39)라는 구절이다.
갈릴리에서 두 제자가 예수님의 ‘계신 곳’을 찾아가 함께 거한 시간은
‘열 시쯤’이라고 했다.
왜 이런 시간들을 자세히 기록했을까?
성경에서 ‘10’이라는 숫자는 ‘충만 수’이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이방으로 흩어진 북이스라엘의 ‘10지파’를 상징한다.
물론 그들이 주님과 함께한 시간이지만 이것은 어떤 영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요2:1
요한은 유독 다른 제자들 보다 예수님께서 움직이시는 ‘시간과 요일’을 여러 번,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요
한복음 1장 시작부터 ‘창조의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창1:3)하신 말씀을
그리스도를 통해 해석한다.
그리고 ‘이튿날’(요1:290, ‘또 이튿날’, ‘사흘째 되는 날’(요2:1)등을 반복하여
기술하였다.
이것은 요한이 예수님의 여정을 ‘창조의 날들’, 하나님의 나라의 빛(진리)가운데
걸어가는 여정으로 해석한 것이다.
내가 이것을 장황하게 나누는 것은 주님의 ‘사마리아 여정’이 단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일반적인 이해처럼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인들이 꺼리는 땅에 가서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음란한 여인까지 품으신 주님 정도로 읽어내면
요한이 의도한 영적 깊이에 도달하지 못한다.
나는 사마리아에 여러 번 가면서 계속 그 땅에 오신 주님의 걸음과 풍경 속에
감추인 비밀을 알게 해달라고 구했다.
그러자 너무나 깊고 놀라운 언약의 고리들이 역시 그물처럼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것을 깨닫는 것에 먼저 가져야할 기초가 요한의 시간 개념과 영적 의도이다.
주님께서 ‘야곱의 우물가’에 앉으신 ‘여섯시’라는 시간은 대부분이 생각하는
‘정오(낮 12시) 즈음’이 아니라 ‘저녁 여섯시 즈음’이다.
로마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에 그들의 시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미 요한이 그런 시간 갠며을 가졌다는 것은 신학자들에게 검증된 것이다.
요한은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요4:6)라고 자세히 기록했다.
예수님이 피곤하시다는 표현을 쓴 것은 이곳이 유일하다.
예수님은 물론 당시 유대인들은 무수한 시간과 거리들을 걸어서 다녔다.
그런 그들에게 낮 12시는 결코 피곤하여 지칠만한 시간이 아니다.
이것은 하루를 끝마쳐 가는 저녁 여섯시, 곧 ‘해질 무렵’인 것이다.
그 시간을 히브리어로 ‘에레브’라고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 해질 무렵의 풍경은 성경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시간인데 곧 ‘하루의 시작’이며
‘어린 양’을 잡아서 저녁 제사를 드리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스9:5
에스라는 ‘저녁 제사’드릴 때에 옷을 찢으며 깊은 회개를 하였다.
이것은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하여 간절히 하루 세 번 금식하며 회개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저녁 기도시간(여섯시)에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응답을 가지고 다니엘에게
온 것이다(단9:2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제사’를 명하셨다.
흠없는 ‘양 두 마리’를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리라”(출29:39)고 하신 것이다.
애굽의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유월절 어린 양 역시 ‘해질 무렵에 잡으라고
명하셨다(출12:6).
이 시간이 저녁 여섯시. 해질 무렵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야곱의 우물가’에 ‘저녁 여섯시’에 앉으신 것은 놀라운
메시아의 시간과 길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저녁 제사’드리는 시간에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가셔서 우물가의 여인을
만나셨다.
그리고 그녀에게 뜻밖에도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요4:23)는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도 하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왜 사마리아에서 이것을 말씀하셨을까?
이것은 ‘마지막 때’에 아버지가 ‘이방의 교회(사마리아)’에서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에 대하여 가르치시는 것이다.
사마리아의 비밀을 계속 구할 때에 그것이 읽혀지기 시작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4:20
사마리아의 여인이 한 이 말은 사실이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려 할 때에 사마리아의 사람들도
동참하기를 원했다(느4:1-3).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방에 혼합된 그들이 거룩한 성전의 회복에 동참하는 것을
극히 반대하였다.
그러자 앙심을 품은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은 주변의 이방 족속들을 동원해
성전을 쳐서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이만큼 이 두 민족은 한 동족이면서도 원수지간이었던 것이다.
나는 비록 사마리아가 이방에 섞였지만 유다가 큰 그릇으로 받아 주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성전은 ‘유대인’만의 것이 아니다.
‘만민(all nations)이 기도하는 집’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 가셨을 때에 거기서 매매하고 환전하는 것을 다 부수고
분노하셨다.
온유하신 주님이 왜 거기서 그렇게 화를 내신 것일까?
그 장소가 바로 ‘이방인의 뜰’이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땅 끝의 이방인들도
성전에서 주의 얼굴을 구하고 기도하는 집‘(왕상8:41-43)이 되게 해달라고 구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좋은 기도요 예배였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증오하여 ‘이방인의 뜰’을 자기들의
유익을 위하여 장사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이방인들의 공간을 빼앗은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매우 싫어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진정한 ‘영과 진리의 예배’에 상반되는 것이다.
결국 다시 건축된 성전에서는 유대인들만 예배를 드렸다.
이방에 섞인 사마리아와 갈릴리등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뼈아픈 상처였을 것이다.
그래서 후에 헬라의 알렉산더가 이스라엘을 점령했을 때 산발랏은 자기들에게도
성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알렉산더는 그것을 들어 주었고 세겜의 ‘그리심산’에 성전을 지은 것이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의 조상들은 거기서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성전도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졌지만 그리심산의 성전은 3세기도 못되어
무너진 것이다.
나는 이 역사적인 배경들을 탐구하면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진정한 예배의 본질을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이 ‘헬라’가 지은 ‘사마리아의 성전’은 어쩌면 우리 교회를 예표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방인들로 구성된 우리의 교회는 헬라의 사상을 기반으로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복음이 확산된 로마, 그리스 등 유럽은 헬레니즘을 바탕으로 하는
지경들이다.
그래서 초기부터 교회는 헬라적인 사상과 접합이 되었고 서구의 신학이 그 체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하면서 절정에 올라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체계아래서 발전하였다.
종교개혁이 다시 성경의 근원적 뿌리인 ‘히브리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가지고 일어났지만 그 바탕은 변하지 않았다.
오늘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하는 성경 이해나 예배의 구조는 사실 매우 헬라적인
요소가 당하다.
사마리아의 이 사건이 이방의 교회를 상징한다는 다른 단서가 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4:17,18
우리는 이 말로 여인이 음란한 ‘창녀’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게다가 정오의 시간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물을 길러 온 여인이니 부정한
여인이라는 것이다.
이미 이 ‘여섯시’는 정오가 아니라 정말 저녁 시간이라는 것을 정리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남편 다섯’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이 사마리아의 배경을 연구하려면 호세아서를 읽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상을 숭배하여 흩어진 북이스라엘, 에브라임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기서 ‘남편 다섯의’ 비밀을 깨달았다.
호세아는 반복하여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호7:1)을 지적하신다.
그들이 ‘음행’을 하여 ‘이방의 왕들’ 곧 ‘남편들’을 찾아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에브라임과 사마리아에 찾아간 이방의 남편은 ‘앗수르, 애굽, 페르샤, 바벨론,
헬라, 로마‘등 ’다섯 나라‘였다.
그것은 그들을 지배한 나라이고 흩어져 간 ‘이방 지역’을 가리킨다.
특히 사마리아는 이 다섯 나라들의 지배를 받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남편 다섯’이 우리 교회가 지배와 영향을 받을 이방의
체계에 대한 예언적인 예표라고 생각한다.
사마리아처럼 우리 교회가 이방적인, 세상적인 것, 헬라적인 것과 혼합되는 예배가
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헬라에 의하여 세워진 ‘사마리아의 성전’은 이방의 교회, 곧 우리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지금의 ‘유대인’과 연결되어진다.
그러나 아버지가 찾으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오직 ‘영과 진리’로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이다.
사마리아의 여정은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