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4
제자들이 음식을 사가지고 왔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행하신 일이 곧 주님을 생존하게 하는 양식이요
생명의 에너지였다.
사마리아 여정 자체가 주님께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였다.
이것은 ‘저녁 제사 드리는 시간’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시는 장면이다.
이것만이 아니라 베들레헴과 나사렛, 갈릴리, 그리고 사마리아, 예루살렘에 이르는
모든 주님의 풍경이 아버지가 찾으시는 영과 진리의 예배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장 온전한 예배자였다.
지금 우리는 매우 현대화 되고 우리의 필요를 따른 예배에 집중되어 있다.
성경이 말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
그것은 아버지가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그 나라의 본질을 결실하는 예배이다.
누가 가장 경멸하고 꺼리는 사람들, 풍경에 가고자 하겠는가?
누가 자기를 죽이려 하는 원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는가?
누가 무수한 이들이 왕으로 삼고자 달려오는데 그것을 떨치고 ‘광야(에레모스)’로
가겠는가?
주님은 거기서 오직 ‘아버지의 얼굴’만 구하셨다.
우리의 예배는 나의 만족과 유익을 구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내 혼적인 무언가에 충족이 되면 좋은 예배라고 은혜 받았다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배는 다르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과 언약에 순종하시는 것이다.
이 사마리아를 찾아 오신 것이 그것이다.
당시의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인식, 관습, 체질로는 올 수 없는 장소이다.
그러나 오직 이곳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과 약속, 성령께서 그 진리의 지경으로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오신 것이다.
그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
그것은 오직 성령에 이끌려 아버지의 사랑과 본질를 살아내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를 오해한다.
우리 자신의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영(spirit)’이라는 것은 ‘프뉴마’ 곧 우리의 영적인 것에도 적용되지만
성경에서 주로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요16:13,14
이것이 곧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의 본질이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와 의’, 곧 진리 가운데 걸어가는 삶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다.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그리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14:26)이라고 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이름’이라는 것은 ‘본질(essence)'을 의미한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본질, 형상, 그 길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성령님은 당신의 무엇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과 참 형상의 본을 알려 주시고 인도하신다.
예수님이 걸으셨던 진리의 길, 천국의 풍경으로 데려 가신다.
바로 진리의 본질, 아버지의 뜻과 마음, 그 나라와 의의 진정한 자리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순종된 삶, 성령님께 순복되어진 것을 ‘참된 예배’라고 하는 것이다.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주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성령충만을 구하고 그것을 느낌으로 감각하며 기름부음이
넘친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에 그친다.
주님께서 걸어가시고 보여 주신 삶의 모범, 곧 성령님의 이끄심에 따라 하나님의
진리의 깊이로 인도함을 받는 ‘영적 예배’가 부재한 것이다.
나는 주께서 다른 곳이 아닌 ‘사마리아’에서 이 ‘영적 예배’의 본질을 가르쳐 주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무엇보다 예배의 본산은 '예루살렘 성전'이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도 모르는 우물가에서 작은 여인에게 그것을 말씀하셨다.
나는 그것이 무척 궁금하였다.
사마리아에는 지금도 야곱의 우물이 남아 있다.
그 우물의 물을 길어 마시면서 나는 내 의문의 갈증을 풀어 주시기를 구했다.
그러자 성령께서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셨다.
요셉에게 준 사마리아의 땅은 바로 ‘세겜’(수24:32)이다.
이 세겜은 처음부터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던 땅이었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창12:6,7
놀랍게도 ‘사마리아(세겜)’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 와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곳이다.
약속의 땅에서 가장 먼저 예배를 드린 곳이 바로 사마리아였던 것이다. ‘
당시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예배하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는 안중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이 언약적 의미를 중요시 여기셨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유대교, 기독교 이전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예배를 가진 의인이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예배’라는 용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창18:2,22:5).
히브리어로 ‘예배’는 ‘샤하’이다.
그것은 ‘엎드려 경배하다’라는 의미이다.
나는 아브라함이 처음 예배한 ‘모레 상수리’에 찾아 갔었다.
이 지역에서 사역하는 메시아닉 유대인인 에브라임 목사를 따라서 사마리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그곳에 올랐다.
모레 상수리가 있던 지역은 매우 높았고 장대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 왔다.
"'모레'라는 히브리어는 '선생'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이 땅은 우리에게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목사의 유대인 사모가 그렇게 말했다.
그분 역시 신학을 전공한 사역자로 성경의 땅들을 다니며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있었다.
길을 안내하던 에브라임 부부가 감추인 비밀을 장소라도 보여줄 것 같은 상기된 표정으로
높은언덕에서 아래를 가리켰다.
“저기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오던 길입니다.
저 아래 요단을 건너 이 계곡을 따라서 세겜에 도착한 것이지요”
에브라임 목사의 말에 아래를 살피니 절로 탄성이 나올만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멀리 요단강과 얍복강을 따라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들어 온 깊은 계곡과 평원이
한 눈에 들어 왔다.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뜨거운 감동이고 흥분 자체였다.
그리고 내가 서있는 이 모레 상수리 땅에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것이다.
사마리아(세겜)는 최초의 진정한 예배가 시작된 것이다.
“저 건너편이 에발산인데...저곳이 바로 최근에 발굴된
여호수아의 제단터입니다.”
이어진 에브라임 목사의 말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여호수아의 제단 터가 이 사마리아의 ‘세겜 땅’에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언약대로 가나안을 정복하고 나서
이곳에 처음 제단을 쌓고 율법을 선포하였다(수24:1-28).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 길갈, 여리고, 아이 등을 계속 정복하면서도
제단을 쌓고 예배드리지 않았다.
길갈에서는 유월절을 처음으로 지키면서도 제단을 쌓지 않고 이 세겜에 와서야
뒤늦게 예배드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신27:4,5
세겜에는 좌우에 ‘그리심산’과 ‘에발산’이 어깨처럼 받치고 있다.
가나안에 들어 가면 반드시 ‘에발산’에 제단을 쌓으라고 하셨던 것이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을 이 말씀에 순종하여 세겜을 정복할 때까지 제단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
여호수아가 세겜에 쌓은 제단은 아버지의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신27:8)고 명령하셨다.
이것이 곧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다.
세겜(사마리아)에 세워진 예배터는 오직 ‘모든 진리’가 새겨진 것이다.
주님께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3)라고 하신 것이 바로 그것과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는 성령님의 인도로 ‘모든 진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처음 제단을 쌓고 예배드린 그 땅을 중요시 여기셨다.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고 하셨을 때 성경은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12:4)라고 기록했다.
당시는 유목민의 시대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면 그동안 터를 잡고 살던 ‘장막집’을
헐고 나무 기둥들을 짋어지고 이동해야 했다.
이 기둥들을 ‘스타우로스’, 곧 ‘자기 십자가’라고 이미 나누었다.
아브라함은 순종은 진정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의 원형이다.
그렇게 말씀에 순종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 와 처음 드린 예배의 지경이 ‘세겜’이다.
그러하기에 주님은 이곳에서 진정한 영적 예배가 무엇인지 다시 말씀하신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이 진정한 예배의 장소라고 믿었다.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던 유대인들은 그것을 멸시하고 자기들의 장소가
진정한 장소라고 주장했다.
물론 예루살렘 성전도 아브라함의 예배가 있던 곳이다.
예루살렘 성전 터는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순종한 곳이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종들에게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창22:5)고 말했다.
여기서 쓰인 ‘예배’가 히브리어로 ‘샤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전히 ‘복종’하여 어린 양들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보여 준 예배의 진정한 본질이다.
바로 그 예배가 이루어진 장소가 모리아산이고 그곳에 성전이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4:21)고 하셨다.
그것은 주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진정으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예배이다.
사마리아는 바로 그런 마지막 때의 진정한 제사장들에 대한 언약이 있는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