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 전 6세기 경 바벨론에 의하여 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의 많은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그 때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
그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비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열왕기하 24:10,14
바벨론에서 약 70년의 포로 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들은 자기 민족의 고유 언어인 히브리어에서 점점 멀어졌고 그 시대에 바벨론을 포함한 넓은 지역에서 국제 공용어로 사용되었던 아람어를 일상 언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모두 셈어에 속하는 유사한 언어였기 때문에 그들은 아람어를 사용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고레스의 칙령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스 1:1-3). 바벨론 포로기에도 먼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굳게 믿고 지켰던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이방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신 계명과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율법대로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느헤미야 1:7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그 땅으로 돌아가고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시기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들의 사명으로 여기고 이방 땅에서 누리던 높은 지위와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고국 땅으로 돌아왔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 7:10
하나님의 율법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율법에는 다른 언어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히브리어 고유의 표현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히브리어로 읽고 가르쳐야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큰 걸림돌이 있었는데 그것은 언어였다. 이방 땅에서 오래 살면서 그들은 자기들이 쓰던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고 아람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느헤미야서는 학사 에스라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율법을 읽고 가르칠 때에 레위인들이 그들에게 그 뜻을 ‘해석’해 주었다고 기록했다.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느헤미야 8:7-8
에스라가 율법을 히브리어로 읽으면 레위인들이 히브리어를 모르는 일반 백성들에게 아람어로 그 뜻을 해석해 준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탈굼의 기원이다. 회중에게 히브리어 성경 본문을 읽어 주고 그것의 아람어 해석을 낭독하는 것은 후대에 회당의 전통적 관습으로 계승되었다.
히브리어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히브리어로 기록된 율법의 의미를 풀어서 가르친 해석, 탈굼은 처음에는 구전으로 전승되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히브리어로 기록한 성문 율법의 권위를 존중하였고 히브리어 이외의 언어로 말씀을 기록하는 것을 금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이것을 문자로 기록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기록된 문서의 형태로 전해진 것이다.
탈굼이 문자로 기록된 정확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7년 이스라엘 사해의 북서쪽 쿰란의 동굴에서 에세네파가 기록한 많은 두루마리들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성경만이 아니라 성경 이외의 두루마리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기원 전 2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욥기 탈굼이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탈굼은 지금처럼 온전한 형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기원 전 2세기에 기록된 문서로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