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3)

  • 김동훈
  • 조회 10018
  • 2014.02.02 23:44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15-20

 
히브리적 사고 방식에 의하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먼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자신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죄를 지은 그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그 사람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동체로 살아가던 시대에 공동체 안에서 다른 형제에게 죄를 짓는 것은
빈번한 일이었고
 그 관계를 되돌려 놓는 것이 필요했다.
다툼을 피하면서 양쪽의 명예를 모두 살리고 화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는데

바로 조용히 협상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상대방이 스스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일대일로 협상을 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때 권고를 받아들이고 사과하고 용서한다면 좋은 해결이 되면서

서로의 수치를 만회하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만약 죄를 지은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좀 더 정확한 방법으로 내가 수치를 당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화해를 시도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나의 수치를 만회하는 것에 비중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회개하거나 또는 용서를 빌게 하는 것이고

나는 용서를 해주는 것에 비중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만약 그가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도 그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서 그 사람을 죄에서 부터 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공동체에 이 사실을 알리고 공동체의 중재를 요구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은 계속해서 그 사람의 명예와 자신의 명예를 
함께 지키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해서 그가 회개하고 화해를 요청한다면  그는 그 사람을 얻은 것이었다.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공동체 안에 일어나는 다툼을 

맬 수도 풀 수도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원하는 그것을 하나님은 들으시고 이루신다.

두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중재자로서 예수께서 계신다.  

하나님 나라에서 어느 누구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단순히 소극적으로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있지만

적극적으로 찾아가서 그 사람의 잘못을 알게 하고

돌이키게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레위기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레 19:17



 
이런 관점에서 신명기 17장의 말씀을 다시 보면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신 17:4-7




이 말씀을 형제를 죽이는 것에 초점을 두지 말고

레위기 19장의 말씀을 적용하여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견책하여 공동체 안에서 악을 제거하여 

그 죄를 담당하지 않는 관점에서 읽어보자.
'견책하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야카흐' 이다.
이것은 책망하는 것이고 징계하는 것이다.
그 책망과 징계의 목적은 정죄가 아니라
죄(불법)에서 떠나 하나님의 법(말씀)으로 다시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롬 3:20)이다.
이 말씀은 공동체의 덕을 세우고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말씀이고 

사람을 죽이는데 초점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 악을 제거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데 초점이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고 음행하였을 때

모세와 엘리야, 비느하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말씀(신명기)를 기록한 모세는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다 멸한다고 하셨을 때

하나님 앞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중재자로 섰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악을 제하고 하나님께 속죄하였다. 

그는 중재자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역할을 하였다.




히브리적인 관점에서 '죽음'이란 개념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과는 개념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진짜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당시 그들에게 죽음이란 이스라엘 공동체로 부터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 '정녕 죽으리라'는 말은

에덴에서 분리되어 쫓겨난 것, 하나님과 분리가 된 것을 의미한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돌아왔을 때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다" 라는 말은

진짜 죽은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로 부터 분리되었던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권고를 듣지 않거든
이방인이나 세리같이 여기라는 것은 
공동체로 부터 분리, 곧 죽음을 뜻한다.

악을 행한 자를 죽이기 위해서는 증인이 먼저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서 악을 제거하라는 것은

그것을 본 증인(한 사람)이 먼저 권고하고 두세 사람이 권고하며

그래도 듣지 않을 땐 뭇 백성이 권고하여

그래도 듣지 않을 때에는 공동체에서 분리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엔 교회라고 번역되었지만

이것은 구약에서 '뭇 백성', 회중이나 같은 의미이다.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출 32:26-30
 

 
여호와의 편에 있는자는 내게로 나오라는 모세의 말에

레위 자손들이 나왔다고 한다. 그들은 어떤 자들일까? 

아마 그들은 죄에서 돌이킨 자들, 회개한 자들

악에서 떠나 하나님의 편에 서기로 결심한 자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레위인들은 원래 다른 각 지파의 장자들을 대신해서 모인 이들이다.  

칼은 성령의 검, 말씀을 상징한다. 
레위 자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형제와 친구와 이웃들을 죽이기 전

성경에 나오진 않았지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먼저 권고하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나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은 죽임(공동체로 부터 분리)을 당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나 바울, 베드로도 죄를 범한 자들을 대하여서  

성경의 어떤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요일 5:16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고전 5:1-5
 
이 말씀은 처음에 약간 이해가 안되는 말씀이다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음행한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하지만 바울은 이것이 그의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한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을 생각하면  

이 의미가 무엇인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하나님께선 주 예수의 날에 아담을 다시 회복하시기 위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신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곧 말라버릴 무화과 나뭇잎 대신, 가죽 옷을 지어 입혀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

한 사람도 심판에 이르지 않고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 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일에 몰두 하였다.


이것에 대해서 유경험자인 바울 사도가 자세히 가르쳐 준다.

좀 길지만 전체를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딤전 1:4-11




성경에서 전체에서 말하고 있는 ‘두세 사람의 증인’은
죄인을 정죄하는 자가 아닌 죄인을 돌이키게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공동체의 덕을 세우고 화목케 하는 말씀을 맡은
중재자인 제사장적 직분을 가진 자들을 말한다.


고린도후서 13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 가면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겠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앞절을 살펴보면 바울은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고후 12:19)”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 12:19-21


바울은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겠다는 말은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의 예수님에 가르침에 따라서이다.
또, 디모데전서 5:19에선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고 하는데
이 말씀도 역시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두세 증인’의 대표적인 모델은 예수님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이다.
그리고 구름과 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 이시며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셨고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자신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까지 기도했고
엘리야도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누가에 의하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은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에도 함께 등장한다.
성경에 수 많은 증인들이 이러한 삶을 살았다.
우리 또한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두세 증인’은 자기의 의를 뽐내거나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자가 아닌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고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케 하지 않으며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해 주님의 애통으로 찾아가는 자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자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나에게 죄 지은 자들을
일흔 번씩 일곱 번(완전한) 용서하고 화해하고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를 힘쓰며 공동체의 덕을 세우고
우상, 악을 제거하는 자들이다.  
진정으로 이런 증인의 삶을 사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고
그들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매이고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그리고 그들이 합심하여 구하는 것을 그들을 위하여 이루어 주신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18,19 

 

 

 

우리가 화목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물론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먼저 성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로 화목하기 원했던 대상은

"이는 이 둘(유대인과 이방인)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엡 2:15,16)”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셨다.

그 분은 자기들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유대인들에게도 그 죄를 돌리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하셨다.

스데반은 자기들을 돌로 치는 형제들을 향하여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하였다.

그들은 충분히 하나님께 정죄받을 만했다.

하지만 스데반은 성경에 그들의 죄를 사하실 것이라는

수 많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그것을 기도한 것이다(사 27:9, 렘 31:34).

그리고 그의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그렇게 기도했다.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8:12


우리는 그들과 화목케 하는 직분을 맡은 자들로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스데반 처럼 기도 해야 한다.

그랬을 때 하나님의 약속대로,

우리가 사울의 돌에 맞아 죽는다 할지라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나온 것 처럼..

하나님은 약속대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셔서

정통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우리와 화목을 이루도록 이루실 것이다.

그러한 자들은 스데반 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먼저 동일한 기도를  올리시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 우편에

중재자두 세로 서 계신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