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

그의 길을 따르다(8)-베들레헴

  • 김우현
  • 조회 4334
  • 2014.02.04 08:40

8.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19:5,6

 

유대의 학자들이나 개신교 학자들 모두가 바로 이것이 ‘여호와의 총회’가

처음 세워진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로 구속된 백성들을 ’내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 하셨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거룩한 공회의 정체성인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들이 순수한 야곱의 혈통들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히 성경은 함께 출애굽한 이들을 ‘이스라엘 사존들’과 ‘수많은 잡족들’(창12:37,38)

이리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지금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세워진 것이다.

‘수많은 잡족(mixed multitude)'의 히브리어는 ’에레브 라브‘이다.

‘에레브’는 ‘혼합된 민족’이란 뜻으로 ‘아라비아’를 상징하기도 한다.

당시 애굽 땅에 거하던 많은 이들이 이스라엘에 붙어서 나온 것이다.

나는 이것에 매우 놀랐는데 ‘아브라함의 축복’이 성취되는 역사였기 때문이다.

이미 시작부터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열방의 족속’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 이방과 이스라엘의 하나 된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세워진

이 때가 바로 ‘오순절’이다.

이것은 그전에 전혀 알지 못하던 충격적이고 새로운 사실이었다.

성경은 이들이 “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출19:1)고 기록했다.

그동안 우리는 ‘유월절’로부터 ‘3개월’ 후에 시내산에 이르렀다고 해석했기에

이 때의 의미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3개월’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셀리쉬 호데쉬’이다.

이것은 ‘3개월’이 아니고 ‘세번째 달’이란 뜻이다.

‘유월절’은 첫째 달인 ‘아빕월 14일(약 4월 중순)’이다.

‘둘째 달’은 ‘지브월’이고 ‘셋째 달’은 ‘시반월’이다.

유월절로부터 세 번 째 달, 시반월이 되는 때가 바로 50일째인 ‘오순절’인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히브리어적인 관점으로 정확히 성경일 읽지 않음으로

이 때가 오순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정확히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제사장 나랑와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진 그 날을 ‘오순절’로 인식하고 ‘룻기’를 읽는다.

이 두 사건은 '떡 집(베들레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정체성‘을 계시하는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오순절에 ‘유대’의 시어미 나오미와 ‘이방’의 며느리 룻이라는

’두덩이 떡‘이 오순절에 다시 ’떡 집‘으로 돌아 온 것이다.

이 떡은 곧 ‘그리스도의 몸’, 메시아의 신부인 백성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무지와 패역은 자신들만의 ‘선민의식’에 갇혀서 ‘열방’을 향한

구원의 언약을 잊은 것이다.

우리는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는 주님의 말씀을

항상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은 그곳이 당신의 몸(교회)를 상징하는 ‘떡 집’이기 때문이다.

이 베들레헴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열방(이방)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떡 집(베들레헴)’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다.

예수님의 여정은 보면 그 땅이 가진 여러 영적, 역사적 의미들과 그 지명(地名)의

의미들과도 깊은 연관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명의 떡이신 ‘메시아의 몸’, 곧 ‘신부’에 대한 아름다운 예표가 베들레헴 땅에서

룻과 보아스를 통해서 그려졌다.

나는 이것을 깨달으며 정말 전율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룻과 결혼한 보아스는 순수한 이스라엘의 혈통이 아니다.

그 역시 이방과 유대의 연합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룻기의 마지막 부분은 아주 독특한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4:18-20

 

예수님의 계보인 ‘다윗’의 족보를 살피면 매우 독특한 영적 그림이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보는 단순한 가문의 족보를 넘어서는 신학적인 의미를 가진다.

마태복음이 그 시작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고

시작하는 것은 사실 놀라운 기록이다.

룻기의 마지막에 기록된 그 족보를 ‘베레스’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성경은 ‘성령님의 영감’으로 아주 계획적이고 전략적으로 구성되고 조직되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부터 ‘두덩이 떡’의 원리가 적용된다.

창세기38장은 요셉에 생애를 기록하다가 갑자기 ‘유다’에 대한 이야기를 삽입했다.

이것은 성령님의 분명한 의도라고 믿는다.

유다는 가나안 땅에서 방탕하고 이방 문화와 그 여인을 가까이한다.

그의 아들들도 그렇게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로

죽음을 당한다.

이제 유다의 계보는 끊어질 위기에 처한다. 만일 유다의 계보가 사라지면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유다 지파의 자손을 통한 구속의 역사도 끊어지게 된다.

이것은 미래에 ‘유대인들’의 패역을 이미 예언하신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아시고 그 길들과 방향을 기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전체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예시(豫示)한 예언이다.

그 때, 대가 끊어질 가문의 위기를 구한 사람이 바로 이방인 며느리 ‘다말’ 이다.

다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창녀(히, 크데샤, 이방 성소의 창녀)의 복장을 하고

시아버지인 유다와 관계하여 아들을 가지게 된다.

그녀는 가문의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그런 극단적인 행위를 한 것이다.

오늘 우리의 관념으로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오히려 야곱의 자손인 유다와 그 아들들보다도 더 하나님의 법과 언약을 잇는 일에

이방의 여인이 극한 열정을 나타낸다.

이 후에 다말이 임신한 것을 알게 된 유다는 대노(大怒) 하였으나 그녀가 제시하는

담보물, 유다가 준 도장, 끈, 지팡이(이 모든 것이 메시아의 사역과 연관이 있다)를

보고 “다말은 나보다 옳도다”(창38:26)라고 고백한다.

많은 학자들은 유다의 이 말이 고대 법정의 언어라고 한다.

법정에서 어떤 행위에 대한 정의, 공의로움을 인정하는 것이다.

‘옳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쩨다카’, 즉 ‘의로움’ 이다.

유다는 창녀의 복장을 하고서라도 가문의 계보를 이은 다말의 행위를

‘의로움’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진정한 ‘의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이방 여인이 보여준 것이다.

다말의 행위는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는 삶의 모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든 이방인이든지 당신의 언약을 생명처럼 붙들고

순종하는 이들을 사랑하셨다.

주님도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라고 하셨다.

이 부분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창세기 38장의 메시지는 ‘후일’에 유다(유대인)가 하나님의 언약, 율법을 어기고

타락할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요셉을 그의 형들이 이방에 파는 것(창37장) 다음에 이 유다의

타락과 이방 여인 다말의 상상 못할 순종을 삽입한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패역으로 끊어질 계대를 ‘이방의 여인(교회)’이 극적으로

이어줄 것에 대한 예언적 의미도 담고 있다.

이것은 메시아의 계보를 이어오는 역사에 계속 적용되었지만(라합,룻 등)

오늘 우리 시대에 대한 중요한 계시이기도 하다.

지금도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갈 ‘다말’과 ‘룻‘같은 ‘의로운 이방인’들을

하나님은 찾고 계신다.

창세기의 ‘유다와 다말’이야기는 바로 ‘두덩이의 떡’인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유대인과 이방의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경륜 가운데 있다.

열방의 교회에 갑자기 성령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기름부음을 부으셨다.

나는 이것을 깊이 주목하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구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의 여정으로 인도함을 받았으며 여기서 진정한 회복의 본질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진정한 이스라엘의 회복은 ‘예수님의 몸’, 곧 영광스러운 ‘교회’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이 둘의 ‘하나 됨’이 지금만큼 깊어지는 시절이 없었을 것이다.

다말이 극단적인 희생을 통해서 낳은 쌍둥이 중의 하나가 ‘베레스’인 것이다(창38:29).

이방여인이 유다와 하나 되어 낳은 베레스는 메시아의 가계를 이룬다.

그리고 역시 모압 여인 룻과 유대 땅 베들레헴의 유력자인 보아스가 하나 되어

그 계보를 이어간다.

나는 여기서 매우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이방의 과부인 룻을 받아들인 대인배 보아스의 아버지가 ‘살몬’(룻4:21)이다.

그는 ‘나손’의 자손인데 놀랍게도 여호수아가 여리고 정탐을 보낸 두 명의 스파이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유대의 전승에는 살몬이 여리고의 기생(이방 성소의 창녀로 알려짐) 라합과

결혼하였다고 한다.

마태 역시 이것을 예수님의 족보로 다루어 신빙성을 입증하고 있다.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마1:4-6

 

우리는 이런 족보 하나라도 매우 신중히 읽어야 한다.

‘보아스’ 역시 ‘살몬’과 이방 여인 ‘라합’의 ‘하나 됨’으로 태어난 것이다.

라합은 이방 여인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그 언약 가운데 들어 왔다.

특별히 그녀가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창문에 내건 ‘붉은 줄’(수2:21)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상징한다.

이 ‘붉은 줄’을 히브리어로 ‘티크바’라고 하는데 ‘소망’이라는 뜻이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시여”(렘14:8) 라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시기를 구한다.

이 간구의 응답이 곧 ‘메시아’이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 나타난 것은 라합의 ‘붉은 줄’이다.

이 세마포천을 붉게 물들인 상징은 ‘어린양의 피’를 나타내는 것이다.

어린 양의 피로 열방을 구원하시는 그 표적이 곧 ‘이스라엘의 소망’이다.

메시아의 구원의 역사는 이방 여인들의 역할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라합은 여리고의 성소에서 일하는 여인으로 알려졌다.

다말 역시 성소의 창녀 복장을 하였다.

룻 또한 일찍 남편을 잃은 저주 받은 모압 여인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에 이 흠이 많은 여인들을 넣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논란이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마태는 부담을 무릎쓰고 이 이방의 여인들을 메시아의 계보에 기록했을까?

나는 거기서 다시 아버지의 심장을 만졌다.

이 여인들은 우상과 저주와 흑암에 사로잡힌 모든 ‘이방인들’을 상징한다.

바울은 이방인인 우리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2:12)들이었다고 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몰랐고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다.

이 여인들은 그런 우리의 상징인 것이다.

바로 ‘땅 끝’의 저주 받은 백성들이었다.

예수님의 계보는 이 여인들이 이스라엘과 연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별히 ‘유다지파’와의 ‘연합’으로 메시아의 계보에 들어오는 것은 놀라운 비밀이다.

나는 여기서 진정한 ‘떡집(베들레렘)’, 곧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의 집(교회)’의

비밀을 깨닫는다.

룻기는 가장 저주 받은 땅에서 온 이방의 한 여인이 끊어질 유다 지파의

한 가문을 살리는데 놀랍게도 그 계보에서 다윗이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다.

우리 아버지의 사람이요 마음의 중심이다.

메시아 예수님은 이 모든 하나님의 측량하지 못할 길들을 성취하시는 아들이시다.

그래서 베들레헴 탄생 하나에도 치밀한 언약과 예언적 구조들과 진리의 그물코들에

서로 엮여지는 것이다.

‘에브라다’는 ‘갑절의 열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충만한 결실’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 되는 것과

것에 대한 예언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믿는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2:15,16

 

주께서 양들을 위하여 죽으시는 것은 ‘이 둘(유대인과 이방인)’을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one new man)', ’한 몸(one body)'을 창조하시려는 것이다.

그래야만 ‘소망의 문’이신 예수님의 몸이 완성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8)고 강조했다.

오순절에 이 두덩이 떡이 아버지 앞에 ‘제물’로 드려지는 것이다.

베들레헴은 바로 그런 언약의 현장이다.

역대기에는 ‘베들레헴의 아버지 살마’(대상2:51)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아브’로서 ‘조상’ 혹은 ‘창설자’라는 개념이다.

놀랍게도 이 ‘살마’가 곧 이방 여인 라합과 결혼한 ‘살몬(룻4:21,눅3:32)이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은 정복하고 그 땅에 살았던 이가 ‘살몬과 라합’이고 그의

자손 들인 것이다.

베들레헴은 유다와 이방이 하나 된, ‘한 새사람’의 땅이다.

거기에 살마와 라합의 결실인 ‘보아스’가 지도자로 살았던 것이다.

가장 저주 받은 이방의 모압 여인 룻은 다시 이 보아스와 하나가 된다.

그렇게 하여 낳은 자식이 ‘오벳’이다.

그 이름은 ‘종(servant)’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오베드’는 성전에서 섬기는 ‘여호와의 종’을 가리킨다.

게시록에서 이들이 진정한 메시아의 신부들이다.

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하나 되어진 결실이다.

이 비밀이 베들레헴에 있다.

죽은자 (112.♡.143.84)
할렐루야!! 보이지 않던 간과하던 곳의 풀림에 놀랍고 감사합니다 !!
임인경 (125.♡.204.15)
* 비밀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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