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

아버지의 뜨거운 마음, 갈릴리(1)

  • 김우현
  • 조회 6800
  • 2014.02.05 10:39

 

 

 

1.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로 갔다.
산을 넘자 너무나 아름답고 푸르른 갈릴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수없이 보았지만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풍경이다.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공생애 사역은 거의가 ‘갈릴리’에서 이루어졌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성지 역시 갈릴리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이 영혼의 본향과 같은 곳이라면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갈릴리’가 그러할 것이다.
나 또한 십 여전 전에 이스라엘을 두루 다니는 동안 갈릴리에 와서야
돌같이 굳은 마음이 풀리며 뜨거운 눈물이 터졌다.
수없이 갔지만 지금도 그 호수를 보면 마음이 봄바람처럼 설레인다.
외적인 풍경조차 갈릴리는 너무나 아름답다.
그런데 그곳에 갈 때 마다 마음에 떠오르는 의문 부호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요7:41-43


앞에서도 나누었지만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 당시에도 큰 논란 거리였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 오실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역의 대부분을 갈릴리에서 행하셨다.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을 위로하고
회복해야만 했다.
그런데 당시에 ‘이방 땅’으로 불리던 갈릴리에서 사역의 거의 대부분을 행하신 것이다.
나 역시 그것이 의문이었다.
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거의 대부분의
하나님 나라 역사를 나타내신 것일까?
우리는 그곳이 외진 곳이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땅이기에 주께서
찾아가셨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로 갈릴리 사역을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그런 이들을 품으시고 뜨겁게 사랑하시고 치유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주님은 그저 인간적이거나 마음의 연민으로만 움직이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의 동선(動線)을 살피면 철저하고 치밀하게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움직이시는 것을 알게 된다.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2)고 하셨다.
‘사마리아’는 당시 유대인들이 극히 꺼리는 곳이다.
심지어 원수로 여기던 땅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곳에 가셨고 그 여정이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이라 하셨다.
그것은 성령께서 그리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역을 연구할 때에 인식해야 하는 중요한 코드가 있다.
마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점을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마1:12)
라고 기록했다.
‘몰아내셨다’는 헬라어는 ‘에크발로’, 즉 강하게 ‘잡아 당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님이 주님을 강하게 잡아서 광야로 데리고 가셨음을 의미한다.
공생애의 시작에 기렇게 기록된 것은 예수님의 모든 여정이 ‘진리의 성령님’께
이끌려 사셨음을 의미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 것’(요16:14)이다.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24:44)라고 하신 그 말씀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계속 탐구하고 있지만 구약 거의 전체적인 흐름이 예수님에 대한 길을 계시한다.
중요한 인명, 지명, 사건들 안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계신 것이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제자들은 구약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행28:23


예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 시편에 기록된 언약의 본질을 이 땅에
새기신 것처럼 바울 또한 거기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여 증거 하였다.
이것은 내가 예수님의 여정을 탐구하는 시금석(試金石)이 되었다.
그저 예수님의 걸으신 길에서 우리에게 유익한 영적인 의미, 교훈적인
메시지만 찾는 것은 진정한 제자의 삶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는 스승의 길을 그대로 본받아 걷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학교나 교회의 닫힌 공간에서 제자를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계속 걸으신 것은 당시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요14:12)라고 하신 것도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많은 유대인들에게는 이해가 안되지만 주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신 것은
하나님의 약속, 예언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함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나는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에 계시된 아버지의 뜻을 알고자 애썼다.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신 비밀을 깨닫게 해주소서.
그 길에 감추인 아버지의 마음...그 뜻을 열어 주시옵소서”
이스라엘에 가서도 새벽에 일어나, 기도의 동지들과 동행하면서도 쉬지 않고
그 간구를 뿌렸다.
진정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
우리가 가난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계속 아버지의 뜻과 의를 구하면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진리의 성령께서 변화와 응답의 지경으로 잡아끄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빌립 집사처럼’이라는 것이다.
한동안 이 주제에 붙들려 혼자서 글을 쓰기도 하고 그런 삶 가운데 들어가기를
기도했었다.
빌립은 12사도 가운데 들이 않는 집사였지만 성령에 이끌려 쓰임 받은
사람이었다.
사도행전에는 빌립의 기사가 매우 중요하고 크게 다루어져 있다.
그는 스데반 사건으로 흩어진 무리 가운데 하나였는데 누구도 꺼리던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행8:1-24).
이것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이던 12제자들도 시행하지 못하던 것이다.
주께서 승청하시기 전에 분명히 성령이 임하면 ‘예루살렘’과 ‘온 유다’,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행1:8)하셨지만 제자들은 ‘유다’이상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빌립같은 집사가 ‘사마리아’로 가서 주님이 행하신 역사를 동알하게
행했던 것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주의 사자’가 그를 강권하여 ‘가사 광야’로 이끄셨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절기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예물을 드리고 돌아가는 ‘에디오피아’의
간다게(여왕의 칭호)의 내시가 있었다.
나는 사도행전을 연구하며 왜 주의 사자가 빌립을 그에게 데려 갔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에디오피아’라는 나라가 가지는 성경적, 역사적인 의미를 연구했다.
그러자 놀라운 비밀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고대의 ‘구스(에디어피아)’를 향한
아버지의 언약들이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깊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빌립에게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역사였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눅11:31


'남방 여왕’은 ‘구스의 시바’를 가리킨다.
그녀는 하나님의 지혜로 놀랍고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고 백성들을 가르치는
솔로몬의 소문을 듣고 찾아 왔다.
그리고 실제로 감동하여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왕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으로
삼아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셨도다“(왕상10:9)고 찬양했다.
‘솔로몬’은 대표적인 예수님의 그림자이다.
스바의 찬양은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다.
‘왕’이신 주님께서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님은 이 스바 여왕(간다게)이 ‘ 땅 끝’에서 왔다고 하셨다.
당시엔 에디오피아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도 검은 피부를 가진 그들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정확히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천사가 성령의 지시로 빌립을 내시에게 데려간 것은 그것이 바로 땅 끝‘에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에는 ‘구스’와 ‘내시(왕의 환관)’에 얽힌 매우 중요한 예언의 구조가 많다.
비록 저주 받은 함의 자손(창10:6)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회복하고 사랑하셨다.
그래서 구약의 많은 부분에 그들에 대한 기록들을 새기신 것이다.
모세가 아내로 취한 ‘구스여인’(민12:1), 다윗을 대적하던 압살롬의 죽음을 알린
‘전령사’(삼하18:21), 구덩이에 빠져 죽어가는 예레미야를 살린 ‘환관’(렘38:7) 등등
많은 기록들이 ‘땅 끝의 구원’과 연결되는 언약들이다.
주의 천사는 바로 그 언약의 본질 가운데로 이끌어 간 것이다.
그것은 당시 누구도 알지 못하고 관심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님의 역사는 정확히 하나님의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내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빌립을 다시 주의 사자가
데리고 가셨다.
누가는 그것을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행8:39)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주목했는데 ‘이끌어 가다’의 헬라어가 ‘하르파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휴거 시에 하늘로 ‘끌려 올라간다’(살잔4:17)라는 말과 동일하다.
강하게 ‘낚아채다’라는 것이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잡아 이끄신 것처럼 빌립을 낚아채서 ‘아소도(아스돗)’
과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데려 가셨다(행8:40).
빌립이 성령에 사로잡혀 간 이 장소, 사람, 길들은 구약의 중요한 언약의
지경들이다.
나는 이것을 연구하며 성령님의 역사는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곳으로 정확하게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빌립은 그것의 지식을 온전히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령에 충만하였고 강렬한 인도하심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작은 제자도 그러할진대 예수님의 여정은 얼마나 더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인도하심을 받았을 것인가?
그래서 거의 날마다 “예수님의 길에 나타난 아버지의 언약, 마음, 뜻으로
인도해 주세요“하고 구한 것이다.
나는 정말 ‘불독 스피릿’으로 ‘갈릴리’도 열릴 때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만큼 주님의 길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계속 멈추지 않고 간구의 씨를 뿌리자 조금씩 비밀을 열어 주시기 시작했다.
갈릴리는 예루살렘에서 ‘이방’이라고 불릴 정도로 변방의 지역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과 달리 그곳은 하나님의 중요한 관심의 땅이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사9:1,2


이것이 구약에 기록된 갈릴리에 대한 가장 확실한 예언이다.
마태도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이 말씀을 성취하는 것(마4:14-16)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갈릴리에 대해서는 이것 외에는 특별한 언급이 구약에 없기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이 변방을 주목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유대교의 신앙은 ‘성전 중심주의’이기 때문에 그 외의 지역들에는 무관심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사실, 이 예언 하나만으로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의 사역 거의 대부분이
갈릴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갈릴리를 주목하시고
아들을 그곳에 보내신 것일까?
우리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너무나 당연시 하여 그 안에 있는 깊은 아버지의
마음과 하늘의 비밀을 구하지 않는다.
주님이시니 모든 것이 가능하고 당연히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묻지 않고 내게 필요한 영적인 교훈만 도출하는 것에 열심이다.
그런 태도가 ‘아들의 형상’을 알짐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왜 아버지는 예루살렘이 아닌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갈릴리 땅을 영화롭게 하고
‘큰 빛’을 비추신다고 예언하셨을까?
나는 계속 이 의문을 품었고 그 답을 구했다.
불신의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너무나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매우 중요한 단서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지도를 펼치고 성경을 연구하다가 갈릴리, 곧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이 그
토록 멸시와 고통의 땅으로 불린 것인지를 발견한 것이다.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왕하15:29


이 역사적 사건이 메시아의 갈릴리 사역과 연관이 있음을 깨달았다.
BC 734년 당시 앗수르의 왕 디글랏빌레셀 3세가 북이스라엘을 침략해서 철저히
파괴하고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다.
성경은 이 악한 왕이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갔다고 기록한 것이다.
위에 나오는 지명들이 ‘갈릴리 온 땅’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바벨론에 끌려간 유다보다 먼저 이들을 생각하셨는가?’하는
의문이 일어났다.
그래서 다시 성경과 역사를 탐구했다.
디글랏빌레셀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간 것만이 아니라 갈릴리 땅에 이방인들을
보내어 살게 하거나 서로 혼인하게 하는 혼혈정책을 썼다.
그것으로 인해서 갈릴리 지역은 멸시와 고통의 ‘이방’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특히 예루살렘 중심의 유다는 그들의 이방인들과 섞임을 조롱하고 손가락질 했다.
그들의 고통을 품기 보다는 이방인과 율법의 외면적 판단 기준에 의하여
비난한 것이다.
세상이 그렇게 멸시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을 깊이 아파하셨다.
그래서 포로로 사로잡혀 이방에 끌려가고 흑암의 땅이 되었던 지점, 갈릴리에
메시아를 보내어 회복과 치유의 ‘큰 빛’을 비추어 주시겠다고 예언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그 마음, 언약을 따라 갈릴리로 간 것이다.
나는 그동안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메시아의 예언에 익숙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오면서 성경을 통전적으로 세밀히 읽기 시작하자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을 향한 것이었다.
나사렛을 공부하며 이미 나누었지만 메시아의 구원의 날은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호1:11) 회복되는 것이다.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은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북쪽 지경의 ‘10개 지파’를 중심으로 ‘북이스라엘’, 그리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다 왕국’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이들은 한 동족임에도 우리의 남과 북처럼 원수같이 담을 쌓고 미워하였다.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자기들만을 구원하러 오는 것처럼
인식하였다.
사실 대부분 메시아의 예언은 ‘바벨론’에 사로잡힌 백성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그들을 돌아 오게 하시는 것에 ‘다윗’과 같은 목자인 왕을 보내주신 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의 메시아에 집착되어 있던 것이다.
흩어진 이스라엘의 12지파가 회복된다 하여도 결국 ‘예루살렘의 성전’을 중심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갈릴리’에 온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갈릴리 온 땅에서 이방으로 끌려가고 고통을 당한 백성들을 생각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근거로 성경을 샅샅이 조사하였다.
그런 가운데 아주 흥분되는 예언의 말씀을 만났다.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라 사자들이 그를 따르도다
처음에는 앗수르 왕이 먹었고 다음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의 뼈를 꺾도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가 갈멜과 바산에서 양을 기를 것이며 그의 마음이 에브라임과
길르앗 산에서 만족하리라
렘50:17,19


하나님께 ‘이스라엘’은 모두 ‘흩어진(잃어버린) 양들’이었다.
‘사자’ 곧 사나운 들짐승으로 상징되는 이방의 세력들이 길 잃은 양들을
사로잡아 간 것이다.
이 아버지의 관점이 바로 예수님께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고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처음’에는 ‘앗수르 왕(디글랏블레셀)’이 그들을 먹었고
‘두번째’ ‘바벨론 왕(느브갓네살)’이 먹었다고 하신 것이다.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끌려 간 자기들의 고난만 생각했다.
그것으로부터 구하시는 언약만 주목하고 잡은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들이 이방에 섞였다고 비난하고 증오한 ‘북이스라엘’의
‘10지파들‘도 깊이 생각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는 이 12지파가 모두 ‘잃어버린 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앗수르에 끌려 간 백성들을 향해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바로 그 지점이 ‘갈릴리’였던 것이다.
성경은 ‘북이스라엘’을 ‘에브라임’이라 부른다.
남왕국과 갈라선 10지파의 지도자가 에브라임 출신의 ‘여호나답’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하고 패역하여 이방에 사로잡혀 갔다고
비난하고 자기들만의 메시아를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달랐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20


이것이 갈릴리에서 이방에 끌려가고 고통을 당한 북이스라엘(에브라임)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뜨거운 마음이다.
분명히 ‘에브라임’이라고 아버지가 애타게 부르지만 ‘유다’는 이것을 만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셨지만 항상 깊이 생각하셨고 창자가 들끓는 애통으로
불쌍히 여기셨다.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는 아버지의 마음과 약속을 가지고
예수님은 갈릴리로 오신 것이다.

 

이수진 (218.♡.93.6)
자기들만을 위한 메시아를 구했다고 한 예루살렘 중심 유대인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를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애통하심이 그들에게도 있나요?
있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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