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창48:2-5
야곱은 애굽에서 요셉이 이방에서 낳은 자식들을 만났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에 대하여 아주 놀랍고 흥미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야곱은 요셉이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려 왔다는 말에 갑자기
힘을 내어 일어난다.
그리고 뜻밖에도 요셉이 이방 땅에서 낳은 두 아들을 자기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목할 것은 요셉의 손자들을 만났을 때, 갑자기 ‘야곱’이라는 이름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계속 야곱으로 불렀는데 갑자기 이스라엘이 된 것은 이방에서
결실한 이들도 ‘이스라엘 자손들’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이런 세심한 기록들을 주목하여 읽어야 한다.
‘야곱’은 육적인 이름이고 ‘이스라엘’은 이방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얍복강에서 그의 환도뼈가 부러지는 씨름을 통해서 받은 축복이다.
그것은 영적인 이름인 것이다.
창세기라고 그냥 고대의 막연한 기록이 아닌 성령의 치밀한 영감의 구조로
쓰여 졌음을 깊이 이해해야만 한다.
야곱은 벧엘에서 받은 축복, “생육하고 땅에 번성하라”(창35:11)는 말씀을
근거로 이 손자들이 자기의 소유(아들)이라고 말한다.
그 때 받은 약속의 성취라는 것이다.
거기서도 하나님은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창35:10)하시고 생육과 번성의
축복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 축복은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1:28
이 처음 창조된 이들에게 주신 축복의 명령을 예수님께서 갈릴리 어부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물리적인 것으로 이해하여 이 세상을, 자연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것은 서구의 정복적인 신학 논리를 야기 시켰고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뜻이 아닌 고통과 피흘림에 이르게 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늘의 새’는 ‘공중 권세 잡은 자’를 의미한다.
“그 때에 너희가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2)는 말씀이 그것을 증명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함’(딤후3:15)이라는
것을 결코 잊으면 안된다.
창세기의 ‘시초’부터 ‘종말’의 디자인을 계시하신 것(사46:10)이다.
‘바다의 물고기’는 이 세상의 ‘정사와 권세’, 곧 ‘짐승의 구조’를 의미한다.
그래서 성경은 ‘바다’에서 짐승들이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더라”(단7:3) 는 것과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계13:1)는 말씀들이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아담’으로서 이 창조의 명령을 회복하고 완성하기 위하여 오셨다.
나는 ‘아담’의 뜻이 곧 ‘사람’이라는 것에 주목했다.
벳새다에서 어부들에게 ‘사람’을 낚는 사역을 하리 한 것이다.
‘사람’의 히브리어가 ‘아담’이다.
이것은 창조 사역의 회복이다.
그리고 창세기의 ‘바다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은 히브리어로 ‘다가’로 되어 있다.
그것은 곧 ‘물고기’라는 뜻이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 ‘물고기’, 곧 ‘바다의 모든 생물’을 잡는 사역이다.
이런 근원적인 부르심과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너무나 작고 개인주의적인 제자의
사명에 매몰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제자들의 어부의 사역은 창세기 시작의 축복과 명령에 연결되는 부르심이다.
어부는 모든 ‘바다의 생물’을 잡고 다스리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실 놀라운 부르심이며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시면서 다시 이 명령을 주셨다.
그런데 자세히 읽으면 이 ‘생육과 번성’이 무엇인지를 해석해 주심을 깨닫게 된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창35:11,12
이것이 진정한 ‘생육과 번성’의 본질이며 사람 낚는 사역이다.
이 말씀을 깊이, 온전히 연구해야 교회의 영광스러운 부르심을 깨닫게 된다.
먼저 ‘생육하라’의 히브리어는 ‘파라’이다.
그것은 ‘결실하다’라는 것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양적인 것 이상의 의미이다.
주님께서 갈릴리의 산상에서 말씀하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마7:17,18)가
바로 그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생육’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열매를 풍성이 맺는 것’이다.
‘번성하라’는 라바‘곧 ’크게 증가하다‘, ’번성하다‘라는 것이다.
역시 성경에서 진정으로 ‘커지는 것’은 이 세상의 감각과 다르다.
주님께서 역시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하나를 심는 것(마13:31)이라
하셨으며 그 나라에서는 ‘어린 아이’같이 자기를 낯추는 사람이 가장 크다고
하셨다(마18:1).
본질을 이미 창세기부터 말씀하고 계시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구원의 본질’을 가르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창세기의 시작부터 계시록까지 이 관점에서 읽지 않으면 인간적인 상황논리에 빠진다.
그것이 유대인들이 범한 오류이며 주님께서 지적하신 ‘사람의 계명’인 것이다.
야곱에게 약속하신 ‘한 백성’은 ‘고이’ 곧 ‘민족들(nations)’을 말한다.
그리고 ‘백성들의 총회’는 ‘카할 암’ 곧 이것이 ‘교회(에클레시아)’의 히브리어이다.
진정한 교회가 무엇인지 이미 구약에서 계시하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아버지의 목적과 관심은 태초부터 이 ‘백성들의 총회’이며 진정한 생육과 번성의
명령을 순종하는 ‘왕들’이다.
우리는 창세기나 출애굽같은 구약의 율법을 매우 육적이고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잘못된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
비록 유대인들에게 외적인 규례와 기록된 문자의 형식으러 주셨지만
이 안에 ‘하나님의 영’을 담으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새 언약의 일꾼’은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3:6)고 한 것이다.
진정 새 언약의 일꾼이라면 알아야 할 진리가 있다.
비록 문자적으로 기록된 옛 언약일지라도 주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피를 뿌려서
영을 회복하신 것이다.
모세가 제물을 잡아서 성막의 모든 기구들과 제단에만 뿌린 것이 아니다.
성경을 기록한 모든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도 뿌렸다(히9:19,20).
율법의 말씀에도 보혈이 뿌려져서 그 안의 영을 회복시킨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의문의 묵은 것, 문자적이고 구약적인 사고로 성경을 읽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영으로 이해하고 그 본질에 순종하시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어부들을 부르신 것 하나에도 깊은 아버지의 뜻과 비밀이 담겨 있다.
야곱은 요셉이 이방에서 낳은 두 아들을 축복하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창48:16)라고 기도하였다.
여기에 갈릴리 어부들과 연결되는 놀라운 언약이 숨어 있다.
이 세상에서 ’번식하다‘라는 말의 히브리어가 ’다가‘인데 그것이 곧 ’물고기‘라는
것이다.
‘다가’는 물고기가 ‘바다’에서 알을 빨리 움직여 이동하고 알을 낳고 번식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것인 ‘다그(물고기)’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신 것은
이 세상(바다)에 있는 흩어진 백성들을 찾아서 회복하는 사명을 말씀하신 것이다.
야곱은 작은 아들인 ‘에브라임’을 장자로 축복하면서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창48:19)고 예언했다.
이미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이 ‘번성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의 자손들이 ‘여러 민족’ 곧 ‘고이(열방)’에 흩어져 번성할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하실 일을 시초부터 계시한 것이다.
지금 주님께서 찾아오신 갈릴리는 바로 ‘북이스라엘(에브라임)’이 이방에 끌려가서
흩어진 지경이다.
그런데 거기서도 가장 이방과 경계였던 ‘벳새다’의 어부들을 먼저 부르시고
‘사람 낚는 어부’로 삼으신 것이다.
이것은 이방(세상)에 흩어진 백성들을 다시 회복하여 ‘하나님의 총회(카할)’, 곧
‘그리스도의 교회’로 세우시는 사명을 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아담에게,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주셨던 사명의 회복이다.
그 에브라임이 이방에 흩어져서 살게 된 자들을 당시에 ‘헬라인’이라고 부른 것이다.
헬라‘는 ’히브리‘의 이스라엘을 벗어난 모든 지경들의 총칭이다.
당시 이방의 세계는 ‘헬라’라고 불리워졌다.
그래서 헬라인들이 찾아 왔을 때, “이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요12:23)고
하신 것이다.
이방의 바다, 사나운 짐승들에게 사로잡힌 흩어진 백성들, 잃어버린 양들을
되찾으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목자가 스스로 죽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그 ‘헬라인들’과 메시아 예수님을 연결하는 제자들을
‘갈릴리 벳새다 사람’(요12:21)이라고 정확히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놀랍고 중요한 장면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벳새다’에서 안드레와 베드로 등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4:19)고 하셨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 사건이 바로 그 말씀의 성취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마치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땅 끝’까지 증인이 된것처럼
벳새다의 어부들이 ‘헬라인들’을 주께 데려 옴으로 흩어진 백성들을 회복하는 사역을
한 것이다.
복음서는 이런 깊은 진리의 구조로 쓰여져 있으며 여기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라는
구조가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