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7)

  • 김우현
  • 조회 7495
  • 2014.02.06 15:11

7.

 

 

 

 

 

 

나는 왜 ‘건너 편’에 있는 헬라의 이 도시들을 ‘데가볼리(decaspolis)라고
불렀는지를 생각했다.
그것은 헬라어로 ‘10개의 도시들’이라는 뜻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곳에 북이스라엘 10지파들, 즉 ‘에브라임’들이 흩어져 살았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10’이라는 숫자는 ‘충만수’이다.
북이스라엘 10지파가 에브라임이라 불린 것도 ‘이방의 충만’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야곱은 요셉이 이방 땅에서 낳은 아들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창48:19)고 예언했다.
이 말은 매우 놀랍고 중요한 예언인데 히브리어로 ‘멜로 하고이’라는 것이다.
‘멜로’는 ‘충만’을 의미하고 ‘하고이’는 ‘여러 민족들(the all nations)’, 곧 성경에서
‘이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방인의 충만’이라고 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롬11:25

 

하나님의 신비, 곧 ‘감추인 비밀’이 ‘이방인의 충만(멜로 하고이)’이 있기까지
유대인들이 ‘어리석음’가운데 갇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비밀이고 그 나라의 경륜이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 이방으로 흩어져 버린 ‘에브라임’은 열방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 온 백성들을 상징한다.
이미 에브라임은 이방 가운데 번성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정해졌던 것이다.
북이스라엘 10지파가 이방에 흩어져간 것은 단순한 죄악으로 인한 심판만이 아니다.
창세기에서 이미 ‘시초부터 종말을 고하신’하나님의 언약이 그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나는 에브라임을 연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고 반드시 그것을
성취하는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 아버지는 수천년 전에 이미 말씀하신 그것을 반드시 이루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진정으로 아버지의 자녀들, 그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깊이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그 나라의 역사에 동참할 수가 있다.
아버지는 그냥 행하시는 분이 아니고 반드시 그 입에서 이미 말씀하신 그것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먼저 오신 것은 바로 ‘에브라임’에 대한 예언과 깊은
연관이 있다.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인들’은 자기 중심주의에 빠져 에브라임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깨닫지 못했다.
이방에 흩어진 이들을 다시 회복하시는 예수님의 역사는 바로 ‘열방’을
구원하시는 하늘의 전략이다.
그리스도의 여정 가운데 이것과 연결되는 매우 흥미로운 풍경이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17:11-1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는 길에 갈릴리에서 사마리아 사이를
통과하고 계셨다.
당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은 2개의 코스가 있었다.
하나는 요단강 줄기를 따라서 여리고를 지나 유대 광야로 올라 가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건이 바로 그 길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극히 꺼리는 ‘사마리아’를 관통하여 가는 길이다.
나 역시 이스라엘에 가면 이 두 가지 경로로 갈릴리로 가거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지나가셨다.
당시 이 길은 지름길로 통했다.
나는 예수님께서 빠른 길로 가시려는 실용주의적인 마음으로 그 길을 택하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리의 성령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로 인도하신 것이다.
가사 광야로 데려간 빌립의 사건처럼 성령님은 아버지의 깊은 언약과 연결된
장소, 사람, 만남들을 미리 아시고 이끄신 것이다.
요단강과 여리고를 통해서 가실 때는 ‘삭게오’와의 만남을 예비하신 것처럼
이 사마리아의 노정에서는 ‘나환자 10명’이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했다.
성경에서 나환자는 ‘진 밖에 사는 자들’이다.
전통 유대인들에게 이 병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지은 ‘원죄의 상징’이었다.
아담이 에덴 동산 밖으로 추방되었듯이 나병에 걸린 자들도 이스라엘의 진 밖에
살아야만 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진(camp)’ 밖인 ‘이방에서 고난 받는 이들’을 상징한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을 치유하신 후에 돌아와 감사와 영광을 돌린 사람에게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눅17:18)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 ‘사마리아’ 지경에 사는 나환자들을 주님은 ‘이방인’으로 부르신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나환자가 ‘10명’이라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그 지경(갈릴리와 사마리아)에서 앗수르에 끌려 간 ‘북이스라엘 10지파’를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님의 여정은 어느것 하나도 우연이 없다.
그 안에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과 언약의 성취를 계시하는 ‘예언의 영’(계19:10)을
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사마리아인들이 성경에서 ‘에브라임’이다.
그들은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북이스라엘을 다스렸다.
호세아는 그들이 이방에 섞여서 이방인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유대인들도 우리 기독교인들도 알지 못한 예수님의 역사가 이것이다.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사역은 ‘에브라임’, 곧 ‘이방에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경륜이다.
학자들은 예수님이 가신 ‘갈릴리아 사마리아 사이’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의 다각도로 밟으면서 그곳이 예수님의 여정에 매우 의미
있는 곳임을 깨달았다.
대부분 깊은 관심이 없는 그 장소를 나는 찾기 위해 많은 조사와 탐구를 하였다.
그런 가운데 역시 주목되지 않는 말씀을 만났다.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요11:52


요한이 기록한 이 구절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한 구절이 가지는 의미를 주목하였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으로 인하여 유다의 산헤드린
공회에서 주님을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그러자 주께서는 ‘유다 지경’을 떠나서 ‘빈들 ’가까운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사셨다.
나는 요한이 이 사건 이후에 유월절에 ‘헬라인들’이 예수님으 찾은 장면과
‘갈릴리 벳새다의 제자들’이 그들을 예수님께 연결한 것을 연구했었다.
사도 요한은 바울 만큼이나 성령의 지혜와 지식의 말씀을 가진 제자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여정을 그냥 외형적인 사건의 나열로서 기록한 것이 아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주께서 행하시고 걸어가신 길 안에 계시된 깊은 비밀들을 담은 것이다.
나사로가 부활한 ‘베다니’는 당시 ‘무화과의 마을’이라는 뜻과 ‘나병환자들’이
살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명의 특징이 가지는 절묘함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성전 밖에 있는 곳으로 고대로부터 ‘진 밖의 마을’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나환자들이 살았던 것이다.
주께서 베다니의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트려 부은 사건(막14:3)은 유명하다.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정통 메시아닉 학자들은 베다니가
‘무화과의 마을’이란 것에 주목하였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원죄의 상징인 ‘선악을 갈게 하는 나무’를 따먹고
수치를 가린 ‘무화과 잎사귀’(창3:7)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은 원죄로 인하여 추방되고 죽었던 인류를 다시
살리시는 메시아의 역사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거기서 부은 ‘향유 옥합’이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라는 것도
바로 그것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예수님의 여정은 그 어느 하나 의미 없는 것이 없다.
아무튼 주님은 이 사건으로 유대인들의 미움을 더 받게 되고 유대 땅을 떠나
‘에브라임’이라는 마을에 가셔야 했다.
이 감추인 여정이 바로 ‘에브라임(이방인의 충만)’이라는 주님의 사역애 대한
예언적인 의미를 가진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신 후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통하여
이방인들 가운데 흩어진 백성들을 구원하셨다.
그 역사가 바로 지금 우리 교회의 결실로 드러난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에 갈 때마다 ‘에브라임’이라는 동네다 어디에 있는지 찾았다.
역시 아린 아이처럼 그 장소로 데려가 달라고 간구하였다.
결국 성령님께서 그곳이 사마리아 부근의 ‘오브라’임을 알게 하셨다.
오브라는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는 ‘타작마당’이 있는 곳이다.
곧 ‘기드온의 언약’이 있는 땅이었다.

기드온은 '미디안과 아말렉'등 이방의 연합군의 압제로 부터 이스라엘을

구했던 사사이다.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스블론과 납달리'와 '이방 갈릴리'에 오셔서 행하실 역사를

기드온의 미디안과의 전쟁으로 예언했다.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사9:4


 

기드온이 사사로 부르심을 입은 '오브라'는 예수님 당시에 ‘에브라임’으로 불린 것이다.

주께서 그 땅에 가심은 '흑암의 지배'에서 신음하는 '이방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예언적인

여정인 것이다.

그 마을 이름이 '이방인의 충만'이라는 예언과 뜻을 가진 '에브라임'이라는 것도 놀라운 것이다.
현재의 지명은 ‘타이베’라고 부르는데 그 땅을 찾아가기로 했던 때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인천공항에서 이스라엘행 비행기를 탔을 때에 습관처럼 입구에 비치된 한국의
일간지들을 가져갔다.
타자마자 신문을 펼쳤는데 놀랍게도 ‘타이베’에 대한 기사가 전면에 가득 실려 있었다.
나는 너무나 놀랐다.
바로 그 땅을 촬영하러 가는데 한국 일간지에 그곳에 대한 기사가 난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그곳은 이스라엘에서 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나는 그곳에 대한 기사를 꼼꼼히 읽으며 아주 흥미롭고 놀라운 정보들을 접했다.
이 외진 아랍 마을은 현재 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그것도 아랍 마을에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곳을 찾아 가자 정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마침 주일이어서 예배를 드리고 오는 동네의 소녀들과 아주머니들을 만났다.

그들은 머리에 모슬렘들의 상징인 히잡을 전혀 쓰지 않고 청바지와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너무나 밝고 인상이 좋은 아랍인들을 만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챤들이었던 것이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오셔서 사셨던 에브라임 땅입니다.
그 때부터 이곳에 크리스챤들이 살게 되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을의 교회에서 사역하는 젊은 아랍인 수사가 그렇게 말했다.
초대교회부터 예수님께서 지내셨던 이곳에서 기독교인들이 살았고 지금까지
계속 그것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내가 아는 지식들과 정보들이 현장에 가면서 많이 수정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 세계에 주민의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마을은 드물 것이다.
게다가 아랍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만 사는데 말이다.
마치 에브라임에게 야곱이 예언한 '여러민족(고이) 가운데 번성하리라'는 것의

성취를 보는듯 하였다.

마을 가장 높은 지역엔 ‘기드온의 타작마당 터’가 그대로 있었다.
나는 그곳의 정상에서 주변을 내려다 보며 촬영하는 동안 이곳이 '10명의 나병 환자'를 만났던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마을’(눅17:11)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지경은 크게 보면 사마리아이고 더 올라가면 갈릴리이기 때문이다.
요한이 기록한 마을 이름이 ‘에브라임’이라는 것은 매우 영적인 의미를 가진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 ‘10지파’를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떠나 에브라임으로 가신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고 ‘우리 밖(이스라엘 집 밖)'에 있는 '양떼들’,

곧 ‘이방’에 흩어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백성들을 찾아 가시는 것을 암시한다.
거기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그 주님의 여정은 제자들을 통하여 계속되었다.
그래서바로 우리,  이방의 교회가 결실하게 된 것이다.

그 주님의 '잃은 양 찾기'는  2천년간 계속되어 결국 위도상으로도 예루살렘에서 정반대의

 ‘땅 끝’에 위치한 한국의 우리에게 까지 이른 것이다.
그것의 시작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여정에서 부터였다.

솨카드 (1.♡.254.16)
갈릴리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는데..이렇게 올려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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