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아버지의 마음을 따라서 ‘진리를 아는 것’에 이르기를 간구했다.
진정 하나님은 하고자 하는 자에게 더 하게 하신다(롬9:18).
내가 ‘에피그노시스’를 지속적으로 구하자 내 안에서 이것에 대한 뜨거운
갈망이 더욱 더 솟아났다.
일단 시작해야 한다.
나는 내 안에서 솟아나는 이 간구가 바울과 동일한 것임을 깨달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1:17,18
바울은 이것이 날마다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라 했다.
성령이 주시는 기름부음 곧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열린다.
여기서 ‘아는 것’이 헬라어로 ‘에피그노시스’이었다.
무엇을 아는가?
말씀을 통해서 아버지의 마음, 형상, 뜻, 계획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면 ‘부르심의 소망’과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그 나라의 기업...
‘영광의 풍성함’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내가 간절히 알고 싶었고 사모하는 것이다.
바울은 다시 이것과 연관하여 매우 중요한 전언을 남기고 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4:13
역시 익숙한 이 구절이 내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면 그 결실은 ‘온전한 사람’이다.
이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는 것’ 역시 ‘에피그노시스’란 단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그냥 확신이나 지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온전한 자각’, ‘온전한 앎’이다.
‘온전한’이란 헬라어는 ‘텔레이오스’로서 ‘텔로스’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것은 ‘’완성‘ ’끝‘, 목표’라는 것이다.
우리가 놓치는 중요한 부분을 바울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믿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다.
물론 그 ‘믿음’의 ‘에피그노스시’에 이르렀는지도 의문이다.
바울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를 이룰 때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목표요 방향인 것이다.
‘텔레이오스’의 히브리적 개념이 ‘타밈’이다.
이것 역시 ‘온전한’, ‘흠이 없는’이라는 의미이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성전 제물에
쓰여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예배), 제물은 정하신 규례를 따라 반드시
‘흠이 없는 정결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타밈’이며 ‘온전한 것(텔레이오스)’이다.
이것의 모델은 아브라함인데....그가 99살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고 명하셨다.
예수님도 이와 동일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5:48
이것은 역시 ‘에피그노스시’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심’, 곧 그의 형상과 의, 마음과 뜻의 본질을 가지고
행하라는 것이다.
이 삶을 사는 것이 ‘온전한 사람’이다.
불법의 영인 사단은 이 ‘온전함’에 대한 열망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버렸다.
에덴 동산에서부터 이것이 흑암의 전략이다.
이스라엘 역시 이 미혹과 공격에 처참히 무너져 버렸다.
외적인 열정과 종교적 외양에 투철하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사람’이
무엇인지 무지할 뿐 아니라 그것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을 상실한 것이다.
그냥 주어진 상황, 제도적 틀, 혼과 몸을 자극하는 신앙적 열정에 안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온전한 사람’, 곧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엡4:13)
것에 대한 깊은 갈망을 찾아 보기가 어렵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진정한 우리의 부르심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롬8:29)이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가는 것’(엡4:14)이다.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의 본질이며 하나님이 바라시는 ‘빛나고 깨끗한 예복’(계19:7)을 입은
‘어린 양의 신부’이다.
이것을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산다.
이것에 이르려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것’ 뿐만 아니라 ‘아는 것(에피그노스시)’에
집중해야 한다.
이 둘이 ‘하나(에하드)’를 이루도록 깊은 집중을 해야 한다.
어떻게 에피그노시스에, 온전한 진리의 지식과 자각에 이르는가?
나는 다시 그것의 본질과 실제에 들어 가게 해달라고 간구하기 시작했다.
계속 구하고 찾고 두드렸다.
그러자 아주 생각하지 않은 말씀의 전략이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