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1

  • 김우현
  • 조회 3362
  • 2016.03.05 19:00

1.

 

 

  성경을 함께 공부하는 첫 시간이어서 저도 기대가 크고 모두 설레임이 느껴지니 좋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로써 각자가 스스로 말씀을 경작하고 발굴하여 하나님 앞에서 ‘학자’의 수준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광야’에서는 ‘만나’가 하늘에서 내렸지만 ‘가나안’에 들어 가서는 그치고 그 땅을 ‘경작’해서 소산을 먹어야 합니다(수5:11,12). 학자의 수준이라고 하니까 신학자를 생각하시고 겁을 먹는 것 같은데 마음 편하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학자’는 히브리어로 ‘림무드’, ‘말씀의 교훈을 받는 자’(사50:4)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에서 ‘라마드’, ‘탈미딤’이라는 ‘제자’가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가르침을 받는 자를 구약과 예수님 당시 제자라고 합니다. 

  제자는 스승과 ‘멍에를 함께 맨 자’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멍에’는 ‘하나님의 법’, 곧 ‘진리’를 가리킵니다. ‘학자’의 수준으로 처음부터 말하는 것은 말씀을 일반적인 것이 아닌 깊이 있게 공부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자세를 ‘중심’이라고 합니다. 중심이 바로 잡혀야 진리의 ‘본질’에 다가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가볍게, 개인적 적용꺼리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나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진리를 깊고 진지하고 위대하게 여기고 탐구했습니다. 그런 중심의 갈망,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야 진정한 생수를 열어 주십니다(계22:17).

  사도 바울은 제자요 학자로서 아버지의 ‘깊은 지혜와 지식’(롬11:33)을 넘치게 깨달은 믿음의 대선배입니다. 당연히 그는 매일 그것을 깨닫기를 진리의 성령님께 구하고 구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것을 ‘주의 길’, ‘주의 마음’(롬11:34)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그것을 깨닫고 느끼고 감각하는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말씀, 아버지의 마음을 앎으로 인한 감격과 송영이 영혼 깊이 터져 나오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의 길을 온전하게 걸어 갈 수 있고 지치지 않는 강함과 담대함을 소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첫 강의 시간이니 주님의 길, 아버지의 마음을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 어떻게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지 기초적인 원리와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왜 말씀을 공부해야하는지 그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먼저 여호수아서의 말씀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지금은 여호수아 때처럼 하나님 나라가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위대한 시즌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 보다도 힘써 ‘여호와를 아는 것’(호6:3)이 필요합니다. 이 중요한 전환기에 대해서는 언젠가 깊이 있게 나누겠습니다.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버지가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가나안 땅은 구원의 완성을 예표하는 ‘안식의 땅’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안삭’에 들어 가기를 힘쓰라고 강조합니다(히4:11).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애굽에서 나왔지만 안식에 거의 들어 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길, 곧 말씀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여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도 ‘광야’의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동일한 영적 실수와 넘어짐을 겪어선 안됩니다. 반드시 안식에 들어 가야만 합니다.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우리가 그 안식의 땅에 어떻게 들어가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여호수아 1:5,6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내가 모세에게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은 ‘임마누엘’의 역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많이 들었던 말씀 같지 않나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말씀을 깊이 깨달으려면 영적인 감각과 눈치가 빨라야 합니다. 그것이 통찰력입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저와 함께 공부하면서 그런 감각들을 많이 배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같은 영으로 성경 전체를 흐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영적인 애굽의 구조에서 나오게 하셨고 이제 제자들인 당신의 몸을 통하여 약속의 땅,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하신 것과 동일하게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19,20

 

  이것은 여호수아에게 주신 약속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약속만 알지 주께서 함께 하시는 그 조건에 대하여는 집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조건은 ‘내가 분부한 모든 것’, 곧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할 때 입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아버지의 임재, 임마누엘의 역사를 경험하는 본질입니다. 제자들에게 하신 이 약속은 여호수아 1장 5,6절의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과 연관됩니다. 그것은 동일한 본질입니다. 

  다시 여호수아를 읽어 볼까요? 말씀은 대강 스치듯 읽으면 안되고 되새김질 하듯 꼭꼭 씹고 눌러서 읽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마치 그 말씀의 수건, 문자 넘어 ‘영(Spirit)’을 흡수해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읽습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여호수아 1:5,6

 

  절대 너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할 것이니 ‘강하고 담대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아주 좋아하는 구절이고 이것에 대하여 일반적인 생각들이 있습니다. 무언가 마음을 강하게 먹고 굳건함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것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읽은 성경은 번역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생각, 관점들이 전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본질이라는 착각은 버려야 합니다. 진리의 본질, 아버지의 뜻을 간파하려면 항상 ‘나’를 부인해야 합니다. 

  이것을 주님은 ‘목 베임’이라고 하셨습니다(계20:4).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증거 때문에 목이 잘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은 헬라어로 ‘프쉬케’, 곧 ‘목숨’입니다. 나의 자아, 자신, 혼적인 생명입니다, 곧 나라는 옛사람의 구조, 나의 틀, 지식과 관점에 묶여 있으면 진리의 영이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독하게 이것을 고집합니다. 아니, 고집하는지도 분별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목이 베어져야, 부서지고 잘려야 주님의 ‘머리 둘 곳’이 됩니다(마8:20). 우리의 머리, 관점, 이해가 아닌 예수님의 머리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가 됩니다. 우리의 구조, 모든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또 부인하고 아버지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겸비한, 가난한 영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를 꺠닫는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강하고 담대하라’에서 ‘강하다’는 히브리어로 ‘하자크’인데 ‘단단히 동여매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강함’이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단단히 묶이는 것’입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과 완전히 연합되고 꽁꽁 묶인 그런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를 가진 또 다른 히브리어로 ‘다바크’가 있는데 이것은 본드처럼 딱 붙은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강력 접착제’를 ‘다바크’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함’, ‘가까이 함’, ‘연합함’이라는 말로 쓰이는데 그것은 모두 말씀 가운데 순종된 자를 말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연합’입니다. 

  다시 반복하여 말씀 드립니다. 말씀을 깊이 깨달으려면 오늘 우리의 언어, 개념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 자체가 말하는 영적인 언어, 감각, 이해의 구조를 익혀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 구조를 ‘문자(Letter)’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본질적 개념을 ‘영(Spirit)’이라고 합니다(고후3:6).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 새 언약의 일꾼은 문자가 아닌 영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강함’은 육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권능, 능력이라는 것은 이 문자적인 개념에 가깝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강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에 있었습니다. 전쟁은 오직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하여 질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차지할 것이며

신11:8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강성하여’지는데 역시 ‘하자크’라는 히브리어가 쓰였습니다. ‘담대하라’는 히브리어로 ‘아마츠’인데 ‘방심하지 않고 깨어 있음’을 말합니다. 담대함은 성격적인 것이나 어떤 확신, 선포의 개념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믿음의 의지가 중요하지만 진정으로 성경적인 강함은 ‘진리’와 ‘약속’ 위에서 굳게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개념으로 ‘깨어 있으라’는 것을 항상 ‘말씀 위에 서는 것’으로 가르치셨습니다(마24:44-45, 눅12:35-37). 이 부분은 뒤에서 깊이 다루겠습니다. ‘담대함’은 하나님의 말씀, 약속을 굳게 붙드는, 반석위의 삶(마7:24)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반석 위에 앉아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이기게 하셨습니다(출17:12,13). 이것이 반석 위에 서 있는 것의 영적 그림이고 강하고 담대함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어있는 상태가 되면 담대하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끝 날 까지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고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의미를 여호수아 1장 7절에서 설명합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여호수아 1:7

 

  여기서 성경을 공부하는 중요한 원리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대구법’입니다. ‘평행법’, ‘병행법’으로도 부르는 이 대구법은 성경에서 같은 의미를 나란히, 병행 구조로 배치하여 반복해서 말함으로 더 깊이 설명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연구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많은 신학자들도 이것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대구법의 원리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이런 병행 구조를 가집니다. 이 구절도 대구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을 반복하시고 바로 다음에 그것의 의미를 병행 구절로 심화시켜 설명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모세가 명령한 율법(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문법이요 원리입니다. 성경은 수많은 곳에서 이렇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강하고 담대한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지키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명령이요 약속입니다. 지금 요단을 건너야할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음성입니다.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은 쉬운 개념이 아닙니다.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진리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역시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대강 이해하고 넘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 하나가 너무나 크고 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길을 정확하게, 똑바로 걸어 가는 의인의 삶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와 심판은 바로 좌, 우로 치우침에 있습니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 것입니다. 그것을 선지자들은 ‘곁길’로 갔다고 말합니다.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하였으므로 ...그들이

쉴 곳을 잊었도다

렘50:6

 

  이것이 좌로 우로 치우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말씀, 올바른 길, 진리의 본질을 벗어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신 ‘길 가’에 뿌려진 씨가 바로 이것입니다(마13:4). ‘씨’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것이 길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공중의 새들(사탄의 세력)이 와서 그것을 먹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좌우로 치우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진정한 결실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니까요. 이스라엘과 교회의 무너짐, 진정한 ‘쉴 곳(안식)’에 들어 가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이것이 ‘미혹’입니다. 성경은 길을 벗어나는 것을 ‘죄악’이라고 합니다. 그릇행하여 각기 제길로 가는 것(사53:6)입니다. 

  이제 영적인 그림이 하나 하나 눈에 들어오지요? 감각과 분별력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김우현 (211.♡.29.188)
토요일 인텐시브 클래스에서 강의한 것을 부분적으로
정리하여 나누려고 합니다.
anna (223.♡.67.68)
감사 합니다~~~!!!!
소금 (112.♡.11.199)
감사합니다~!!^^
paul (175.♡.49.237)
감사합니다 신학생인데 큰 도움이 됩니다~
senazum (221.♡.134.18)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비를 만난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