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2

  • 김우현
  • 조회 2473
  • 2016.03.15 12:03

 

2.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온전히 진리의 길을 걷는 영적인 실제를 ‘의의 길로 행한다’(시23:3)고 합니다. 잠언에서는 이것을 ‘성도들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의 길을 보호하시고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신다’(잠2:8)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여러번 반복하여 강조하시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성도’는 ‘하씨드’ 곧 ‘경건한 자’입니다. 진정한 성도는 자기 길이 아닌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길을 걷는 자들인데 그들을 ‘의인’이라 부릅니다.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그런 자들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은 진정한 '교회'는 '거룩하여 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고전1:2)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나 성도가 아닌 것입니다. 반드시 거룩함과 의의 길, 진리의 길을 온전히 걸어야 교회요 성도인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 길을 걷는 자의 삶을 지키시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길에 서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비결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오직 하나님의 계명, 예수님의 새계명을 지키는 자를 아버지가 사랑하십니다. 그 길, 그 삶, 그의 생을 지키시고 은혜로 채우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의 삶에 나타나십니다. 우리가사모하는 주님의 임재는 이 조건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간절히 소망하는 그것들입니다. 신약에서 '성도'는 ‘제자’입니다. 제자는 주님을 따르는 자들인데, 그것은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원어에서는 같은 길에 서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곧 스승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자가 ‘강하고 담대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길을, 그 음성을 듣고 따르는, '동행'의 실제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 사람들의 가르침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의 길에 온전히 서기를 갈망하는 영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중심’입니다.

  진리의 길을 걷는 것을 히브리어로 ‘할라크’라고 하는데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6장에  노아가 어떤 자인지를 설명하는데 사용됩니다. 노아는 최초로 하나님과 동행한  ‘의인’이라 불리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세기 6:9

 

  노아의 족보, 그의 생애는 ‘의인’이고 그 시대에 ‘완전한 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요약 됩니다. 이것 역시 대구법입니다. 같은 본질, 의미를 나열하여 깊이 설명하는 성경의 문법입니다. 의인은 완전한 자며 오직 하나님의 길을 걷는 영적인 실존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길을 치우치지 않고 온전히 걷는 자입니다. 그것을 ‘동행(할라카)’이라고 합니다. 이것 역시 성경 전체에서 가르치는 개념입니다. 제가 반복하여 ‘성경 전체에서’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기에 진리의 ‘처음과 나중’이 같습니다. 아버지가 하늘에 세우신 뜻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동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전체의 문맥과 영적인 흐름을 분별하는 감각을 키워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하고 역시 치우치지 않고 통전적인 안목으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주의깊게 살펴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일고 수없이 반복하여 공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그 기초들을 성령께서 사용하여 연결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각 지체들이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몸을 자리게 함'(엡4:16)과 같이 진리도 각 지식들이 서로 연결되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경 공부를 기초지식과 성령님께 구하여 가르침을 받는 것을 통하여 시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배우고 알고 있는 지식, 전통적 관점들이 있을지라도 다시 내려놓고 아버지의 진정한 마음, 뜻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심령의 가난함’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중심을 터뜨려 드려야 합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귀하게 보시고 긍휼을 베푸십니다. 또한 그래야 좌,우로 치우치지 않게 됩니다. 중심이 올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가볍게 말씀을 대하는 것 같습니다. ‘거룩한 것’, ‘진주’를 ‘개’와 ‘돼지’에게 주지 말라(마7:6)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을 향한 책망입니다. ‘개와 돼지’는 ‘이방인’을 상징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누구보다 성경을 열심히 탐구한 자들이지만 자기들이 가진 전통과 지식을 자랑하는 교만의 영에 갇혀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구조를 의롭다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요 '이방인의 영적 구조'입니다. 

  자기의 유익과 만족, 배를 채우는 것으로서 구하는 자들이 그런 자입니다. 솔직히 우리 대부분이 그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지를 쉽게 분별하지 못합니다. 온전한 진리가 우리 안에 충만하지 못하기 떄문입니다. 자기에 갇힌 상태에 있으면 거룩하고 보석과 같은 위대한 진리가 우리에게 깊이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생명이고 역사하는 영이기에 진정한 의인의 영과 중심을 가진 이에게 반응하도록 디자인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우리의 중심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육신에 속한, 이 피상적인 체질을 바꾸고 하나님의 진리를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마7:7)가 되어야 합니다. 노아는 모두가 패역한 시대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창6:2)'만 추구하는 시대에 홀로 깨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였습니다. 그런 자였기에 엄청난 심판 앞에서도 깨어 있고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곧 큰 시험과 환난에서 ‘이긴 자’입니다. 계시록에 하나님의 유업, 새예루살렘을 상속 받는 ‘이기는 자’가 이런 자입니다.

  노아에게 붙여진 ‘의인’은 곧  ‘완전한 자’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어로 ‘타밈’이라 합니다. ‘타밈’은 ‘흠이 없다’는 의미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흠이 없는 제물, ‘어린 양’에게 쓰여진 말이니다. 이것은 바로 어린 양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의 길을 예시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진정으로 모든 ‘의인들’의 모범이십니다. 의의 길을 걷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고자 하면 복음서의 주께서 사신, 걸으신 그 영적인 본질을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오직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행하는 것으로 '양식'(요4:34)을 삼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광야학교>에서 몇 년간 주님의 길과 가르침에 집중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직 그분 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입니다. 이 중심을 놓치면 죽습니다. 그릇 행하고 좌,우로 치우칩니다. 오직 예수님이 모든 진리의 기준이요 푯대입니다. 의인의 개념을 설명하는 히브리어에 ’야사르’가 있는데 이것 역시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올바로, 야사르)’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야살의 책>이 그 의미입니다. 

  다시 처음에 시작한 본론으로 돌아 가서 다음 구절인 여호수아 1장 8절에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와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수1:7)는 명령을 탐구하다가 조금 길어졌습니다. 이것이 평행 댓구법으로 쓰여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하여 가져야할 영적인 중심인 ‘강하고 담대함’ 곧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그 다음 구절이 대구법의 형식으로 답을 주는 것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이것이 좌, 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입니다. 이것이 강하고 담대함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자체적으로 설명하고 본질을 연결해 갑니다. 스스로 해석하는 구조로 디자인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선배들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원칙을 깨달은 것입니다. 율법책, 곧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그 길, 그 법을 온전히 깨닫고 온 맘과 뜻과 정성을 다해 행할 때 진정으로 ‘평탄’과 ‘형통’이 임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장 소망하는 축복입니다. ‘평탄하다’는 히브리어로 ‘짜라흐’인데 이사야 55장 11절을 통해서 이것이 어떤 뜻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이사야 55:11

 

  여기서 ‘형통함’이 ‘짜라흐’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의 기쁜 뜻을 이루어서 하나님이 보낸 일을 형통하게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너무나 중요한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닫고 그 길에 주의하여 순종할 때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형통’을 줍니다. 그동안 우리는 삶의 ‘형통’을 구했습니다. 은혜와 축복을 갈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룸으로 부어지는 축복과 은혜라는 것임을 간과 했습니다. 그냥 우리의 필요, 부흥을 구하는 이방인의 체질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쓸것과 필요를 이미 아시는 분(마6:8)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들어가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할 때 우리를 형통하게 하고 평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조건 ‘주여, 주여’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 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말씀)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간다'(마7:21)는 것이 이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기쁘신 뜻을 이루는 영적인 구조가 될 때 진정한 ‘형통’, ‘하나님 나라의 유업’에 들어 갑니다. 이것을 놓치면 거짓된 평탄을 구하고 결국 무너집니다. 너무나 많은 사역들이 '부흥'과 '하나님 나라'라는 미명아래 번창하는 듯 하였으나 대부분 얼마 못가 무너지는 것은 진정한 '형통'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에 ‘평탄하게 하다’와 이사야 55장 11절에서 ‘형통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동일하게 ‘짜라흐’입니다. 우리에게는 ‘평탄하게 하다’라는 개념이 추상적이지만 히브리어 ‘짜라흐’는 ‘막힌 것을 무너뜨리고 돌진하는 것’, 즉 강력한 ‘돌파'를 말합니다. 이 ‘평탄하게 하다', ‘짜라흐'는 우리 앞에 막힌 산, 높아진 것, 하나님의 영광의 길과 형통을 가로막고 있는 '견고한 진'을 다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짜라흐’는 시편 1편에도 나옵니다.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1,2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 의인은 역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여호수아에게 주었던 동일한 말씀입니다. 시편은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가 되는 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3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순종하는 자는 모든 일이 ‘형통’합니다. 이것이 ‘짜라흐’입니다. 이것이 진정 ‘안식’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열매와 유업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순종하며 온전한 길을 걷는 조건이 있습니다. 이런 자가 강하고 담대한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 아버지의 뜻에 대한 집중력이 약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열심과 헌신, 어떤 사역적인 것을 해야 하늘문이 열리고 형통함이 부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헌신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헌신과 열정의 깊이와 넓이가 커져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시편 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 그 길에 충성되는 자가 형통하리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을 하고 싶어도 먼저 그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시편은 다윗의 삶을 통해서 이 영적 유업을 누리는 형통함의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사울은 이 의의 길에서 실패한 왕의 모델입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한 ‘좌우로 치우친 자’의 전형입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도 왕을 버리셨다”(삼상15:23)는 사무엘의 아픈 선언은 제게도 항상 충격입니다. 우리 모두 '왕과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입었지만 '말씀을 잃으면' 버림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사울처럼 이 두려움이 없습니다. 아말렉의 좋은 것으로 아버지께 예배하겠노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멜렉은 에서의 씨이고 육신의 상징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것을 받지 않습니다. 오직 '제사'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순종'을 원하시고 기뻐하십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지만 진정으로 ‘의의 길’을 걷기까지 수많은 광야의 연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정말 ‘좁은 길’을 걷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온 삶으로 증거한 자입니다. 의의 길,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찾는 이가 적은 좁은 길이고 매우 매력적이고 가치가 있는 거룩한 길입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편 1:4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묵상하고 치우치지 않는 길을 걷는 ‘의인들의 길’은 인정하십니다(시1:6). ‘인정하다’의 히브리어는 ‘야다’인데, 그것은 ‘결혼한 부부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많은 능력을 행하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모른다”(마7:23)고 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생각엔 그런 이들이라면 정말 잘 아셔야 할 텐데 왜 그들을 ‘모른다’고 하신 것일까요? 바로 앞구절에서 ‘주여 주여’ 하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마7:21)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 순종이 없는 사역, 열심과 헌신은 모른다고 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런 자들이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주의 이름을 불러도 ‘혼인잔치’에 들어 가지 못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눅13:25). 말씀을 '등불'을 꺼트린 어리석은 처녀들입니다.

  의인의 길을 걷는 자들은 이 세상이나 사람들이 평가해 주지 않아도 아버지가, 아들이 잘 아십니다. 항상 함께하십니다. 형통함이 열립니다. 그러나 악인들, 곧 좌우로 치우쳐 각기 자기 길, ‘곁 길’로 가는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일시적으로 누리고 커지는 것 같지만 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빠져나가고 무너집니다. 반석이 아닌,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을 지금 열방의 교회와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목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조가 무너지고 있다면 그것은 모래위에 집을 지은 것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현저히 무너지고 있지만 왜 그런지 조차 분별하지 못합니다. 진리가 그 속에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서 분별하는 영적 감각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너짐과 공허를 만회하려고 더욱 다른 프로그램, 집회, 열심들로 치장하지만 이미 많이 늦었습니다. 더욱 무너질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듯이 우리는 이 무지와 어리석음을 항상 벗지 못합니다. 그것이 아버지 앞에서 부끄럽고 죄송할 뿐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무너짐, 교화사와 현재, 열방의 그 흥왕했던 사역들, 구조들이 무너짐의 이유는 오직 성경 그대로 되는 것 뿐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 그를 심판하리라"(요12:48)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왜 말씀을 이렇게 공부해야 하냐면 모든 것이 아버지 입에서 나온 진리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형통도, 심판과 무너짐도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굉장히 대단한 것 같지만 다 모래처럼, 바람처럼 손에 잡히지 않고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들은, 진리를 아는 자들은 자유합니다. 강하고 담대합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6

 

  이 말씀은 제 심령에 깊이 자라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저를 겸손하게 해줍니다.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착각, 무언가 깨달았다는 교만,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나의 구조들을 다시 돌아 보게 합니다. 진정 하나님이 아시는, 우리 주님께서 “내가 너를 아노라”하시는 그런 의의 길에 서 있는지 끝없이 구하게 합니다. ‘악인들의 길’은 겉으로 드러난 ‘악의 형태’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더 아름답고 진실하고 뜨거운 열심일 수가 있습니다. 

 

내가 증언 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롬10:2,3

 

  악인의 길에 선 자들은 ‘올바른 지식’, ‘야사르’의 본질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보다 하나님께 열심인 자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열심은 그들에게 훨씬 못 미칠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함으로 그들은 좌, 우로 치우쳤고 결국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쓴 격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이 헌신, 열심히 모두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는 착각에서 속히 내려와야 합니다. 물론 우리 안에 진정한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눅18:13)라는 세리의 간구가 우리의 중심에서 터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의의 길에 동행하려면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진정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별과 깨달음을 주시지 않으면 올바른 지식에 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의인’,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영적 구조를 부르시지 않습니다. 스스로 건강하다, 내가 가진 이 진리와 열심의 구조는 옳다고 여기는 스스로 ‘건강하다’ 자부하는 자들을 찾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9:13

 

  예수님은 자기의 가진 구조를 자랑하거나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이런 영적인 가난함, 중심을 드리지 않으면 ‘자기 의’에 갇히게 됩니다. 그래서 참으로 ‘악인의 길’이란 분별이 어려운 것입니다. 자기가 보기에,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더 아름다워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고 많은 이들이 자기의 길이 진정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치달아 간 것입니다. 최근 말씀을 깊이 깨달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을 간혹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의 특징은 자기의 지식이 가장 옳고 기존의 교회나 가르침들은 하찮거나 틀렸다고 강하게 비판하는 영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그들이 남들과 다른 어떤 말씀의 구조를 본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런 교만함에 기초하거나 비판의 영을 가진 것은 가장 '악인의 길'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스스로 치우쳐 곁 길로 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신으로 마치는 것이 대부분임을 발견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정말 무언가 가졌든 아니든 극한 '가난함'을 지향해야 합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아니',  '낮추어짐'이라 합니다(신8:2,3). 그런 자들에게 아버지는 거처가 되시고 장막을 치십니다. 천국이 그런 자들의 것입니다. 이것만이 진정 우리로 가나안의 유업, 안식의 본질을 상속 받게 합니다. 그것이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것이고 '형통'과 '임마누엘'의 실제입니다.





강유식 (223.♡.212.119)
너무감동적입니다
숨이먿는듯합니다
가슴이시원합니다
많는글을보고싶읍니다01031118880
책이나동영상이나어떤자료라도구하고싶읍니다
연락기다리겠읍니다
소금 (123.♡.77.118)
인쇄해서 공부하고  반복하여 복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풀어주시니 재미나고 신이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