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

'완전한 진리'의 여정-시편 연구-1

  • 김우현
  • 조회 1579
  • 2016.08.29 14:37

 

광야학교의 <토요 인텐시브 클래스>에서 하는

'시편 강의'를 간략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시편'은 '예언의 노래'(대상25:1,2)로서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진리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을 연구할 때, 아버지의 마음, 의의 길로 회복이

이루어 집니다.

 

 

 

1.

 

 

오늘부터 시편을 공부합니다.

개인적으로 많이 기대하고 소망했던 시간이어서 제 안에 깊은 감사가 있습니다.

전에도 부분적으로 나눴지만 본격적으로 이 위대한 진리의 본질을 

깊이,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먼저 시편의 처음, 1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의 원리는 그 ‘첫 머리’, 곧 ‘장자’에 '본질'을 담는 것입니다. 

‘장자의 원리’는 성경의 아주 중요한 기초인데 시편 역시 그 처음 부분에

시편 전체의 길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율법에서 ‘처음 난 것’, 첫 열매, ‘초태생’은 모두 ‘나의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장성한 자들은 그런 말씀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1-3

 

너무나 유명하고 열방의 교회가 암송하다시피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잘 안다는 착각을 합니다.

우리의 착오와 함정은 익히 알려진 것들, 오랜 전통의 근거들을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것들 안에 진리의 부분들이 있을 터입니다.

그러나 진리란 아버지의 본래적인 영, 마음, 의의 구조여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실패한 부분이 그것인데 자기들이 오랫동안 안다고 생각해온 구조를

진리라고 확신한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이 시 1편의 진정한 영적 본질을 온전히 알았던 적이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제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너무 익숙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 시편을 다시 공부하면서 거의 모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문자 적으로는, 사람의 사전적, 문자적인 이해는 가졌지만 아버지의 진정한 뜻을 영적으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 본질을 온전히 알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고 싶어서, 알기 위하여 함께 공부해 보기를 원합니다.

시편은 '영적인 노래'입니다.

이 시편의 '첫 머리'는 성경 전체의 가장 본질적인 ‘의인의 길’을 집약한 시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복’은 곧 ‘영생’이요 ‘구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창세 전에 아버지가 예비하신 유업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주목하십시오!

그들(복있는 자들)은 무조건 자기 열심만 가진 신앙인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악인들의 꾀’와 ‘죄인들의 길’과 ‘오만한 자의 자리’에 함께 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냥 문자적으로 읽으면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패역한 자들의 삶을 

말씀하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교회에, 신앙에 열심인 자들에게 ‘악인’이나 ‘오만함’은 어울리지

않게 느껴집니다.

그런 느낌 자체가 아직 본질을 읽어내지 못했음을 알게 하는 척도입니다.

이것은 모든 세대를 거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걷는 진리의 길에 대한 분별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악인과 죄인, 오만한 자'의 의미를 성경 자체의 개념으로 공부하면서

이것이 바로 나의 모습임에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자들의 길에 서

앞으로 그것은 더욱 나누기로 하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서 있는 자들은 반드시

그런 자들과 함께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영적 지경이 우리 안에 없어야만 영생의 복을 누립니다.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의인의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6

 

그러므로 ‘복 있는 자들’은 아버지가 아시는 ‘의인들(짜디킴)’을 의미합니다.

‘인정하신다’의 히브리어는 ‘야다’인데 ‘실제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안다고 하시는 '의인들'은 또 누구인가요?

그냥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그런 신앙인들인가요?

일반적으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우리는 이제 시편 공부에서 진정한 '의인의 길'을 배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아버지가 아신다고 하시기에 진정한 '의인'의 실제를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서나 선지서, 시편등에서 이 '악인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압니다.

그들은 흔히 생각하듯 일부러 악한 짓을 하거나 아주 패악한 못된 종자들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고 제사장, 선지자 같은 '주의 종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법, 의의 기준에 검증 할 때에 악을 행하는 것으로 판별되면

아버지가 모른다고 하십니다.

저는 이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아주 좋은 예가 산상설교에 나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2,23

 

여기 주님께서 ‘모른다’고 하신 이들은 신앙 생활을 안하거나 아주 형편없는

악한 자들이 아닙니다.

주님 말씀대로 그들은 외적으로는 정말 열심있는 사역자들이요 신앙인들입니다.

뜨거움으로 "주여, 주여"하고 주님을 부르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선지자의

삶과 병과 귀신을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하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정말 헌신적으로 사역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아주 이상합니다.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우리와 다른 패역한 자들이겠거니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뜨겁고 헌신된 종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의의 기준, 진리의 준거틀로 분별 할 때에  ‘불법’을 행한 자로 

판명이 났기에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시편에서 말하는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헌신과 열심이 진정한 진리의 기준에 합당한 것이 아닐 때, '불법'이 됩니다.

이것이 엄중한 진리의 세계입니다.

우리처럼, 세상처럼 쉽게 타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좋은게 좋은 것이고 은혜 안에서 다 해결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다 용납하신다는 위대한 착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불법’은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아노미아’인데 ‘노모스’, 곧 ‘하나님의 법’을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그것이 곧 ‘죄’(요일3: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 공의, 말씀의 법을 벗어난 삶을 ‘악인’.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 ‘악인’을 문자적으로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기에 이것에 대한

감각이 매우 둔합니다.

악인은 패역하고 우상숭배하고 하고 ‘적그리스도’로만 생각하는데 이 악인의 길이 

바로 우리의 길일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온전한 진리가 없다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하나님의 복, 영생을 누리는 자입니까?

진리를 온전히 알고 그 길을 걸어 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복있는 자들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2)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을 매우 낭만적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매우 심각하고 충격적이며 치밀하고 본질적입니다.

율법을 ‘즐거워 한다’든지 ‘주야로 묵상한다’는 말을 우리는 껍데기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우리가 지금 하는대로 성경을 암송하거나 큐티나 묵상하는 것이겠지 

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에 의하면 그것은 ‘가나안(안식)’에 들어 가느냐 아니냐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안식의 땅’에 들어 가는 것이 바로 ‘복을 받는 것’입니다.

‘영생’이요 ‘구원’의 본질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수1:8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하고 쉽게 느껴지면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가 진리를 단순하다고 말하는가요?

그것은 세속에 물든 우리의 편리주의, 실용주의적 사고입니다.

그것이 가장 성경에 경계하는 ‘죄’입니다.

물론 진리를 그것을 꺠달은 이에게는 단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은 매우 깊고 오묘하며 측량 할 수 없는 아버지의 의, 길, 마음을

담고 있는 지혜와 지식입니다(롬11:33,34)

아버지의 진리는 깊은 비밀이며 ‘엄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시편의 '마지막'은 150편입니다.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편 150:1

 

시편의 시작은 진리의 길을 걸어 가는 의인들의 삶이고 그 마지막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성된 영생의 풍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과 나중'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진리'라는 히브리어 '에메트'는 알파벳의 가장 처음인 '알레프'와 중간인 '멤',

그리고 마지막인 '타브'로 구성된 것입니다.

상식적인 말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1편과 150편은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문자적으로는 전혀 다른 시처럼 보입니다.

1편은 '복있는 자'에 대한 것이고 150편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찬양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문자와 수건을 벗기고 그 안의 '진리의 영'을 읽어내는 이라면 이것이

같은 본질임을 간파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성소’, 곧 ‘하나님의 성소’에서 ‘찬양함’이 '영생의 축복'입니다.

당연히 '찬양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찬송가나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노래로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 특히 시편의 찬양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소에 거하는 종들, 아버지가 아신다 인정한 거룩한 의인들이

'영과 진리로서 경배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찬양'입니다.

앞으로 시편에서 '찬양', '감사', '즐거워 함', '기도'라는 의미들을 배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소에서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이제 시편을 공부하면서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 전에 아버지가 예비하신, 정하신 가장 신령한 복(엡1:3)입니다.

우리로 그 아들 안에서 흠이 없는 거룩한 존재들이 되고 그 은혜의 영광을 깨닫고

찬송하는 자들(엡1:4-6)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우리 삶에 영적 혁명이 일어나고 불법 안에서 열심이 아닌 '완전한 진리'를

사모하는 갈망이 샘처럼 터질 것입니다.

여기 150편 1절에서 시편 기자는 그냥 ‘성소’가 아니라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찬양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성경의 중요한 문법은 같은 개념을 병렬적으로 나열하여 그 깊이를 더하는 것인데 

특히 시편이 병행구조로 된 구절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성소’와 ‘그의 권능의 궁창’은 동일한 개념입니다.

‘권능’은 히브리어로 ‘오즈’입니다.

그래서 ‘오즈의 마법사’가 나왔는지는 모르나 하나님의 ‘능력, 위엄’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런 단어들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문자적 개념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궁창’은 ‘라카아’인데 창세기 1장 8절에 처음 나옵니다.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세기 1:8

 

‘궁창’이 ‘하늘’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성소’에 있는 자들은 ‘하늘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하늘에 속한 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계시록에서 구원의 완성을 나타내는 

비전으로 나오는 하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계7:14,15, 22:3,4)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신앙, 조직과 예배의 구조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위엄과 능력이 있는 그 보좌 앞에서, 그 얼굴 앞에서 섬기는 하늘 백성이

되는 것이 진정으로 찬양하는 자들입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계22:3-5

 

계시록의 마지막 완성, 새 예루살렘의 비전이 바로 그의 성소, 권능의 궁창에서

찬송하는 종들의 모습입니다.

시편의 완성은 이것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죽은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영적 실존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그 자체입니다.

이것이 '주의 영광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을 단지 우리의 영적인 어려움에 위로와 소망을 주는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영적인 교훈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구원의 완성을 향해 걸어 가는 의인들의 여정에 대한 깊은 비밀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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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현 (218.♡.76.218)
그동안 주로 깊이 연구한 말씀들을 <광야학교>에서만 나누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주 3회의 강의준비에 집중해서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인지 외부에 알리고 나누는 것에 점점 무관심하고
소홀하게 됩니다.
그러나 조금 힘을 내어 시편 강의를 정리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진리의 본질을 배우는데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샬롬하시고 홧팅하세요.
정상훈 (112.♡.228.253)
가끔은 외부에도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감독님의 흔적이 반갑고, 귀한글 올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에게는 너무 어려운내용이지만 꼭 소화시키고싶어서 계속 공부중입니다.
박숙현 (180.♡.34.251)
귀한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제삼시를 찾지 않다가 8월에 우연히 버드나무 아래에 들어오게 되었네요^^;
샬롬 예루살렘과 샬롬 이스라엘!
특별히 샬롬 이스라엘!!!
정말 감사했습니다.
광야가 보고싶어서 이스라엘 여행을 꿈꾸었는데...
감독님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