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

'완전한 진리의 여정'-시편연구-2

  • 김우현
  • 조회 2692
  • 2016.08.29 15:17

 

 

 

2.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3

 

이 시 1편에 나오는 구절은 우리가 잘아는 익숙한 것입니다.

그냥 대강 읽어도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구원의 가장 본질적인 비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시편 기자가 말하는 '복있는 자'인  ‘그’는 히브리어 성경에 

‘하이쉬’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번역된 것이고 원문은 히브리어로 쓰여져 있습니다.

우리 번역에는 그냥 ‘그’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정관사 ‘하(영어의 the)’가 붙은

‘이쉬’, 곧 ‘그 사람’입니다. 

히브리어 '이쉬'는 '남자'를 가리키는데, 히브리 성경에서 '그 남자'는 그냥 사람의 

성별이 아닌 '영적인 구별'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을 그냥 문자나 우리의 개념으로 읽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가진 본질을 읽어내야만 진리에 접근하게 됩니다.

'하이쉬(그 남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적인 언어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정관사가 붙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의미를 나타냅니다.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주목하는 ‘거룩한 의인’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자들입니다.

구약 시대의 진리의 길을 걸어간 의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예표들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슥3:8

 

스가랴 선지자 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아버지는 ‘예표의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인 ‘싹(메시아 예슈아)’의 예시인 것입니다.

복있는 그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자로서 ‘철(사시,절기)’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 역시 아주 아주 깊은 영적인 개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계시하는 '절기(모에드)'와 연관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다루다가는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해서 절제하기로 합니다.

진정한 '의인들'은 '절기의 본질'을 알고 그것의 열매와 추수에 이른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절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본질을 계시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개념들을 알지 못하면 그냥 '물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늘 푸르른 영혼이구나..

그런 정도의 감성적인 해석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정도에 머물러 있구요.

우리는 이것이 역시 계시록의 마지막 비전에 나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시록 22:1-2

 

이제 감이 잡히시는지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생수(물가)’를 먹고 ‘달마다(철따라)’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들'이 바로 시편 1편의 ‘물가에 심기운 나무들’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생명의 근원, 그 나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과 연결되는 영적인 그림이요 예언입니다.

이 '축복의 지경'이 열려야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들어 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 구원의 비전, 완성의 그림들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니 이제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된다...는 정도의

생각을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구원의 길은 깊고 위대하며 놀랍도록 거룩한 여정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시편이 구원의 본질을 예언적으로 노래한 것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동안 이해 해온 시편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 다음 구절을 다시 살펴 보십시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계시록 22:3

 

느껴지는 것이 있으신지요?

보좌로 부터 나온 '생수의 강가(물가)'에 심겨진 나무들, 그 진리를 흡수하여 때를 따라

열매를 맺는 이들, 아버지 얼굴 앞에서 경배하는 자들에게는 다시 '저주'가 없습니다.

이것이 시편이 말하는 하늘의 '복이 있는 자'입니다.

‘다시 저주가 잆다’는 것은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지요?

그것은 ‘에덴의 타락’으로 인한 ‘저주’가 다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저주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담은 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하아담'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이런 성경의 일점일획을 놓치면 안됩니다.

지금까지는 어쩔수 없었다 해도 이제는 주님 말씀대로(마5:17-19) 정확한 진리의 길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미 우리가 창세기 공부에서 깊이 탐구했지만 ‘에덴동산’과 ‘아담’은 ‘성소’와 거기서

예배하는 ‘제사장’에 대한 계시입니다.

이것은 이제 신학자들도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거기서 추방된 것이 '저주'입니다.

아버지의 보좌, 임재, 얼굴 앞에서 에덴의중앙에서 흐르는 그 생수( 물가)에 심겨진

나무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저주는 사라지고 다시 ‘그의 종들’이 생명수를 먹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들이 되고

진정으로 하나님과 어린 양을 섬기는 경배가 회복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성소’에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회복이 일어날 때 비로서 진정으로  "할렐루야!"를 소리 높여 외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찬송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의 주제입니다.

타락한 아담(이스라엘, 교회)이 다시 ‘에덴의 성소’, 곧 ‘영과 진리의 경배’를 회복하는 

치열하고 뜨거운 갈망과 여정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27:4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84:1,2

 

시편 기자들의 가장 큰 갈망과 노래는 ‘하나님의 집(성소)’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며 사는 그것입니다.

너무나 자주 읽은 구절들이라 감동의 깊이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이것이 진정한

구원의 본질입니다.

이제 시편을 공부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그 영적인 비밀의 감격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기 소망합니다.

우리의 묵표는 시냇가에 심겨진 아버지가 기뻐하시고 주목하시는 ‘그 한사람(하이쉬)’, 

그 ‘의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인의 길을 걸어 갈 때, 비로소 진정으로 ‘할렐루야’를 외치게 됩니다.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기뻐 뛰고 큰 소리로 예배하고 찬양한다고 하지만 아버지가 

"내가 너를 모른다"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가장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처럼 열심은 대단한데 우리를 모른다고 하시고 심판을 받는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요?

그러나 누구도 우리가 가진 이 영적 기초가 아버지 앞에서 심판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확신이 믿음이 좋은 것이라 착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믿음은 심정의 확신이 아닙니다.

진정하고 온전한 진리의 반석 위에 서는 것입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계시록 22:4

 

보좌로부터 나온 그 생명의 진리를 먹고 자란 그 나무들’ 곧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나무들’(시92:13)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자들입니다.

이것 역시 시편의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다양한 시편의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가구한 내용이 ‘주의 얼굴을 보기를 원합니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17:15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시67:1,2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시119:135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내용이 ‘주의 얼굴을 보는 것’에 대한 간구입니다.

계시록 22장은 이것이 역시 마지막 구원을 이룬 자들의 영적인 실제로 계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 ‘주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냥 막연히 한 시대의 유행처럼 주의 얼굴을 보게해달라고 기도하고 찬양할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진정 주의 얼굴을 봐야 ‘하늘에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시편 공부에서 이 부분 역시 깊이 공부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육신에 속한 ‘부분적인 것’을 넘어서 ‘온전한 것’, ‘장성한 자’의

수준에 이르면 ‘주의 얼굴과 얼굴 마주 대할 것’(고전13:12)이라 했습니다.

주의 얼굴을 보는 영적 수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아가페)’에 이른,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자들의

영적인 모습입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하이쉬(그 한 사람)’입니다.

신약에서는 ‘아들의 형상을 본 받은 자’(롬8:29)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아주 쉽고 가볍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함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수준, 형상, 이름, 얼굴, 유업을 가진 자가 되어야 진정한 ‘자녀(아들)’입니다.

그 모델은 단연 우리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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