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

'완전한 진리의 여정'-시편연구-4

  • 김우현
  • 조회 1387
  • 2016.08.30 16:03

4.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사무엘하 22:1

 

이제는 '시편'은 어떤 것인지를 공부하고자 합니다.

그냥 자기 감동에서 나온 찬양이나 기도, 시만은 아니라는 것은 대강 알지만

도대체 어떤 영적인 메카니즘에 의해서 시편들이 쓰여지고 구성되었는지 정확히

손에 잡히지는 않으실 겁니다.

지금 읽은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노래(찬양)'한 것'인데

그것이 '시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잘 살피면 시편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모든 원수'는 '블레셋의 거인족들'(삼하21:15-21)입니다.

'블레셋'은 성경에서 유일하게 '할례 받지 않은'(삿14:3, 삼상17:26, 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방인'들입니다.

성경을 온전히 공부하려면 이런 표현들을 무심히 지나치면 안됩니다.

이방인들은 모두 할례받지 않은 자들인데 '블레셋'만 그런 이름으로 부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딤후3:!5)임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블레셋'은 진정으로 '심령의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에 대한 상징인 것입니다.

그 블레셋 족속들 중에서도 이 노래와 시는 '거인족(라파)'을 이긴 것에 대한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정관사를 붙여서  '하라파'라고 씀으로 그 거인족들이 어떤 영적인

의미를 가짐을 나타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10지파 정탐꾼들이 '악평'을 하게 한 그 '네피림의 자손들'(민13:32,33)에

해당되는 족속입니다.

민수기 역시 '한네피림'이라는 어느 특정한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6장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6:4,5



왜 시편의 의미를 공부하는데 이 말씀을 연결하는지 아시는지요?

시편의 대부분은 다윗이 말하는 '모든 원수들'들과의 관계에서 나온 기도, 찬양들입니다.

특히 다윗의 시에는 이 '원수들'이 시편 1편에서 이미 나누었던 '악한 자',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런 성경의 영적 본질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표면적이고 문자적인 것만 보면 진정한 시편의 본질과 그것으로 거룩한 의인이 되는 것에서

실패할 수 있습니다.

위의 말씀은 다윗이 이긴 '모든 원수'인 '네피림'의 '근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창6:2,3)으로 아내를 삼아서

생긴 족속들입니다.

이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자기들 보기에 '아름답다'(토브)고 여기는 그것에 취해서 아내를 삼았는데 그 결실이 '거인족'입니다.

네피림의 히브리어는 '네필'인데 그것은 '추락', '타락'을 뜻하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외적으로 장대한 거인들이라는 것에 주목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기쁘시 뜻(히브리어 토브)가

아닌 자기들이 원하는 것, 자아의 열망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죄악의 관영함'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모든 원수들. 사울, 압살롬, 아히도벨, 블레셋 등 모든 세력들은 바로 이 영적 구조를 가진 

'욱신에 속한 자'들입니다.

곧 오늘 우리의 모습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탄식하며 하나님의 얼굴과 구원,  뜻을 구하는 기도를 했는데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영적인 실존이기도 합니다.

그 원수들, 악한 자들의 공격과 지배를 다윗은 '환난(짜르)'이라고 합니다.

역시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죄악, 불법, 악함에 대한 탄식이며 거기서 해방되고자 하는

갈망인 것입니다.

그런 내용의 기록들이 시편입니다.

그리고 그 원수들의 손에서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은혜를 찬양한 것이

역시 시편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은 이 '영적인 원수'를 이긴 자의 노래이며 그 '육체가 됨'에서 해방되는 비밀인 것입니다.

이 기초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시편 전체의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이 '거인족들' 이기고 찬양한 그것이 시편 18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편 안에는 모든 하나님의 대적, 악의 구조들, 불법의 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전략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단지 블레셋 거인들이나, 당시 다윗의 대적들을 이긴 것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에서도 이 전쟁에 정관사를 붙여  '함밀하마'(삼하21:19)라고 기록했습니다.

왜냐하면 시편은 개인의 영적 상황 속에서 나왔지만 그들 안의 성령님이 동일한 영적 전쟁을

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그것을 노래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시 다윗의 노래 다음에 나옵니다.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사무엘하 23:1

 

이것은 시편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말씀이므로 주목하여 살펴야 합니다.

다윗이 '말하는 것'의 히브리어는 '네움'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말하다'는 주로 '아마르'나 '다바르'를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왜 '네움'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이젠 원어 성경으로 살펴야 합니다.

'네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매우 엄중한 말씀'을 가리킵니다.

시편은 그냥 다윗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기도나 감사, 깨달음의 자기 고백이 아닙니다.

그들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루아흐)'이 각 상황을 통해 아버지의 엄하고 무거운 뜻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이 히브리어 '네움'이 사용된 중요한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민 24:4,5

 

이 성령 충만함으로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놀랍게도 거짓 선지자의 대명사인 '발람'입니다.

여기 발람이 '말하기를'이란 히브리어가 바로 '네움'입니다.

이것은 육신에 속한 발람이 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영적인 눈에 열리고 말씀이 들여 오기 시작하자

갑자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네움'입니다.

다윗이나 시편의 저자들은 연약한 자들이고 자신의 '연약함'이나 외부의 '원수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영적인 말씀을 듣게 되고 비전을 보고

엎드려져 말씀을 말하게된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의 원리입니다.

발람같은 육신에 속한 자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 입술이 하나님의 진리, 비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시 앞에서 읽은 구절을 살펴 보겠습니다.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사무엘하 23:1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엄중한 진리인 '네움'을 말하는 자인데, 그것을 말하는 자의

조건이 무엇인지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시편 저자들의 영적인 정체성과 같습니다.

먼저 '높이 세워진 자'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알 후캄 학게벨'인데 '높이(알)', '세워진', 또는 '올려진(후캄)'. '그 사람', 또는

'그 용사'(학게벨)입니다.

시편의 저자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들은 이땅에 살지만 '높음', 곧 '하나님의 성소', '권능의 궁창'에 거하는 자들(시150:1)입니다.

'세워진 자'는 '쿰'이라는 히브리어에서 나왔습니다.

잘 아시는 그 말은 '일어난 자', '부활한 자'. '깨어난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발람은 '눈을 뜬 자', '보는 자'라고 했는데 이것이 '부활'의 본질입니다.

육신의 눈, 관점에서 죽고 영적인 눈, 관점이 열려 아버지의 진리, 비전, 뜻을 분별하고

보는 수준입니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삼하23:1)로서

'네움'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노래(찬양)'은 단순한 곡조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 형식을 무시하지 않지만 '노래'는 하나님의 영적인 비밀, 계획, 뜻을 보고 선포하는

'신령한 노래'(대상25:1,2), '새 노래'(계14:3)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게베르'라고 부릅니다.

'게베르'는 시편의 중요한 용어로서 하나님의 용맹한 자들, 용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8

 

여기서 '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바로 '하게베르'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자'입니다.

이것을 통해 시편의 본질을 맛보기로 느끼실 수가 있는데 하나님께 '피하는 자'의

히브리어는 '하싸'입니다.

이들은 심판과 환란의 때에 오직 아버지의 구원, 날개 아래, 피난처에 들어 갈 수 있는

'남은 자들'입니다(사14:32, 57:13, 습3:ㅣ12).

바로 '물가에 심겨진 복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런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아는 자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잘알고 있고 대강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선하심'은 히브리어로 '토브', 곧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온전하고 완전한 아버지의 지혜, 길, 의의 본질(토브)을 '맛보다'는 '타암'인데 그것은 '감지하는 것'입니다.

깨닫고 이해하고 느끼고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예비하신 그 의의 길, 진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 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그 그늘, 날개 아래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가 바로 '하게베르'입니다.

이들은 또한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바로 앞에서 다윗은 동일한 본질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편 34:6

 

그는 자신을 '곤고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히브리어로 '아니'인 그것은 '가난한 자', '낮추어진 자', '온유한 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가난한 자', '온유한 자'가 그것입니다.

이 '아니'의 본질을 가진 자들이 시편의 대표적인 주인공들입니다.

그것은 철저히 자기가 부인되고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진리만을 담아낸 자들을 가리킵니다.

시편이 지향하는 가장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영성이 바로 '아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깊이 주목해야 합니다.

시편은 이들의 부르짓음(카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기도 합니다.

신약에서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11:29

 

'온유하고 겸손하다'가 히브리어로 '아니'입니다.

시편의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바벨론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성전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심'(빌2:8)으로 하나님의 높임과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이것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하나님의 성소에서 찬양하는 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길은 오직 아버지 보좌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요14:6)이며

그 자체가 '성소에서 찬양하는 삶'의 원형이었던 것입니다.

시편은 전체가 이 본질에 이르는 것을 지향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사무엘하 23:2

 

그런 하나님의 성소에 오른(알리야) 높이 세워진 '하게베르', '다윗'같은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혀'에 두십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입니다.

시편이 전부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래서 시편 안에는 아버지의 진리의 길, 본질, 영적 원리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그것들을 깊이 보고 느끼고 맛볼 것입니다.

시편은 그저 성도들의 감성적인 고백이나 은혜의 찬송이 아닙니다.

진리의 성령님이 주시는 '말씀'자체입니다.

 

 

다윗이 군대 지휘관들과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는 이러하니라

역대상 25:1

 

다윗만이 아니라 성소에서 섬기는 찬양하는 자들이 부른 '영적인 노래'가 시편에 수록되었습니다.

유명한 아삽, 헤만, 여두둔은 모두 시편의 저자들입니다.

그들이 부른 노래 역시 다윗처럼 성령이 임하여 '그 말씀'을 부어 주신 것으로 '신령한 노래'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역시 정관사가 붙은 '한니바'인데 곧 '나바', '예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예언'은 아버지로 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길, 비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시편은 '예언'입니다.

저는 <숨겨진 일>이라는 시편을 연구한 책을 쓰면서 그 안에 감추인 놀라운 예언적 구조를

탐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을 예언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이 그것을 지나치다고 비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아는 이들에게만 읽히도록 초판만 찍고 절판하였습니다.

시편은 우리가 상상 하는 것 이상의 놀라운 '감추인 보화'입니다.

 

 

 

 

 



지극히작은… (218.♡.1.209)
귀한 깨달음 감사합니다. 몸도 마음도 점점 지쳐가는 시대이지만.. 다윗처럼 환란 중에도 주님의 말씀과 뜻을 더욱 치열하게 구하는 자가 되기 위해 기도하고 공부하겠습니다. 힘들고 지쳐있던 마음에 용기 얻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