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생육, 번성, 충만-1

  • 김우현
  • 조회 1589
  • 2016.09.16 12:54

추석 명절에 그동안 쓰던 '시편'을 잠시 접어 두고
최근 '율법 강의'에서 나누었던 '신령한 복'에 대해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정리되면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구체적으로 
이해될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작은 일에 충성하며 멈추지 않고
그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그렇지만 쓰다보니 전혀 새로운 강의를 다시 하는
기분이 듭니다.




1.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1:27,28

 

창조의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창세 전에 예비하신 그 축복,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의 본질이 

무엇인지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이 축복이 임해야, 그 영적 본질이 있어야 ‘일곱째 날’의 ‘완성’으로 들어갑니다.

창조의 마지막 날, 구원의 완성인 ‘그의 안식’에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오해, 무지가 우리를 낮은 영적 수준으로 전락시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 곧 ‘거듭난 자’가 반드시 이 ‘생육’, ‘번성’, 충만‘의 

축복을 받아야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인식이 없었언 것은 그 축복을 매우 문자적이고 표면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우리는 '그 안식'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여섯 째 날에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에게

이 '신령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깨달은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가 '창세 전에 예비하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엡1:3)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의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도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바울 사도는 ‘만드셨다’는 말을 헬라어 ‘포이에마’로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작품’,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선한 일'을 위해서 ‘지으심을 받았다’와 병행적으로 연결되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멈춥니다.

사도는 ‘선한 일을 위해서’라는 조건적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그것의 헬라어 ‘아가도스 에르곤’은 히브리어 ‘토브 마아세’와 상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 본질과 실제가 바로 ‘생육, 번성, 충만’입니다.

그 축복을 가진 자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뜻(토브)대로 행하는 '선한 일'을 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에 들어 가는 삶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하셨습니다.

안식은 '아버지의 일', 곧 '선한 일'을 하는 영적 수준입니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기쁘신 듯(토브, 선한 일)으 행함이 있어야 '천국'에 들어 간다(마7:21)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정확히 들어야 합니다.

누누히 나누었지만 그것은 영적인 '들을 귀'가 없으면 결코 듣지 못합니다.

우리가 읽고 듣고 공부하고 무언가 안다고 생각 하는 것이 진정으로 들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 안목에서는 이것이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진리는 하나입니다.

그것이 분리되어 이해됨으로 우리가 ‘선한 일(하나님의 토브, 기쁘신 뜻)을 위해 

지음 받았음(거듭남)‘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들은 영적으로야 분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안식)'에 이르는 길이 '생육, 번성, 충만'의 축복임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받아야 할 하늘의 축복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막심한 손해가 

열방의 교회에 있습니다.

우리의 기준에서, 땅의 차원에서의 축복, 부흥, 번성과 충만에 집착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를 이렇게 점점 황무하고 피폐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온전한 '생육'의 축복 만이 결코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 '번성'을 가져다 줍니다.

그 '번성'이 있어야 완성인 '충만'에 이릅니다.

이제 공부를 통해서 우리가 알던 것과 사뭇 다른 게념들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무슨 특이하거나 절묘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그 본질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가진 은혜, 축복이 가장 좋다고 만족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은혜마저도 너무나 감격이고 기쁨입니다.

그것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는 우리의 영적인 것만 아니라 모든 것에서 축복을 주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창조의 ‘안식’, ‘영생’에 들어가려면 이 ‘생육, 번성, 충만’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실제로 그것을 누려야만 합니다.

다음 구절을 주목해서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히4:1,2

 

초대교회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대와 겹치고 위대한 사도들로부터 말씀을 들은 복된 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던 것입니다.

예전 부터 저는 이 말씀에 의문이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사도는 우리가 모델로 생각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한 걱정이 있습니다.

‘안식(구원)’에 들어갈 ‘약속’을 받았다 해도, 직접적으로 말하면 ‘영생의 확신을 가져도’

들어가지 못할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이 약속을 받으면 누구나 들어간다고 확신하지만 사도들의 관점을

조금 다릅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가지는 안타까움은 지금 우리가 진리라고 확신하는 많은 부분이

성경의 본질과 다른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앞에서(히브리서3장) 이스라엘이 왜 어린 양의 피로 구속을 받았는데,

‘안식(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는가를 반복하여 치밀하게 강조합니다.

그리고 ‘우리(초대교회)’도 그들(이스라엘)처럼 ‘안식(구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았지만 들어가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받은 '복음'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자유와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구속되고 그 약속을 받았는대 왜 그들은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그것이 사도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3:17,18

 

이스라엘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불순종', 곧 ‘믿지 않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깊이 주목하여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상관이 없는 패역한 이스라엘의 이야기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사도는 '우리(신약성도)'도 '그들(구약성도)'처럼 '안식(영생)'에 들어가는 약속을

받았지만 들어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왜 성경을 정확히 읽지 않는 것일까요?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표면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은 그들이 ‘믿지 않았다’라고 말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 대하여 정확히 알지 못하기에 이런 부분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믿지 않았지만 우리는 믿기 때문에 당연히 안식에 들어 간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초대교회) 역시 그들(이스라엘)처럼 ‘복음’을 받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복음)’이 그들에게 유익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따라고 복음을 들었습니다.

우리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의 원문에는 그냥 ‘들은 말씀’이 아니고 정관사를 붙여서 ‘그들은 바 그 말씀’

(호 로고스 테스 아코에스)이라고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냥 들은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듣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점으로, 이해의 구조 가운데 받고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인식해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진 믿음의 개념도 이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진정으로 ‘그의 안식’에 들어가게 하는 믿음은 ‘그 말씀(호 로고스)’을

‘그 들음(테스 아코에스)‘으로 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말씀하신 그 진리의 본질을 온전히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말씀(호 로고스)'는 사도들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요1:1)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원문 성경을 살피면 사도들이 정확하게 그것을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구약 시대에 무슨 예수님 말씀을 듣는가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 자체가 아주 무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계셨던 '그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1-3

 

우리가 무심히 읽고 넘어가는 이 말씀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초'의 '그 말씀(호 로고스)'이라는 것을 사도 요한은 강조합니다.

우리가 무수히 공부 했지만 이  태초의 '하늘과 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 나라의 백성들,

'이스라엘과 교회'(신32:1, 사1:2, 계21:1-3)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임을 가르치지만 우리는 여전히 수건에 가려져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임한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호 로고스)'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안식(영생)'에 대해서 사도들과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정확히 정관사를 붙여서 '그 말씀', 그 들음', '그 믿음'에 부합되어야 

안식에 들어 간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마음, 뜻, 의로부터 나오는 그 진리의 말씀을 온전히 듣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어야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표면적으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나름대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출애굽'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그 말씀'을 온전히 듣는 '그 들음'에 이루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3장에서 이것을 이미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히3:10,11

 

사도는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그 위대한 하나님의 권능과 구원의 역사들과

홍해, 광야의 표적들을 보고도 하나님의 진정한 ‘길’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항상 미혹되어서’라는 것입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찌 하든지 그들의 외적인 모습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 진정한 말씀의 의미, 그 길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항상 구약을 읽을 때에 '그리스도께 돌아 가야 수건이 벗겨짐'(고후3:14,16)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요14:6)입니다.

성경의 모든 하나님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막연히 동의 하지만 진정 이것을 깨닫는 이는 드뭅니다.

그것이 외형적으로는 믿고 따르지만 '불순종'과 '믿지 않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온전히 그 길을 깨닫고 그리로 걸어 가지 못하면 믿어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모세를 통한 인도를 따라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고 따르기는 하되, "주여, 주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순종하려고 하기는 하되 

진정한 ‘그 말씀’을 ‘그 들음(온전히 깨달음)’으로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나눔들을 어렵게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존의 관점과 조금 달라도 이것을 이해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배들, 사도들은 이것을 정확하게 구별하고 강조하여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롬10:16


우리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단순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것의 원문과 정확한 의미를 깨닫는 다면 생각이 바뀔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처음부터(롬10:1) 바울 사도가 말하는 '이스라엘'입니다.

우리는 '복음'이 예수님이 오셔서 '신약' 시대에만 가르쳤다고 생각하는데 사도들은 이상하게

구약 시대 이스라엘이 들은 말씀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런 오해의 간극은 사도들의 관점과 지금 우리의 개념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 당시엔 아직 '신약 성경'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성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행28:23

 

사도들에게는 '구약'의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읽혀졌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성경(구약)'은 '영생'에 대한 것이고 그것은 '나(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요5:39)이란 가르침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받은 말씀은 '복음'이 됩니다.

그래서바울 사도는 '그들이 다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다'(롬10:16)고 한 것입니다.

그냥 '복음'이 아니라 원문에는 '토 유앙겔리온', 곧 '그 복음'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사53:1)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우리'는 이사야 같은 구약의 말씀을 받은 담지자, 증거자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한 것'은 역시 정관사를 붙여서 '테 아코에', 곧 '그 들은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도 우리의 번역 성경처럼 '전한 것'이 아니라 정확히 히브리어로 '들은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요?

'복음'은 말씀을 받은 사람들의 '그 들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인간적인, 사람의 이해와 관점, 깨달음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 주신 정확한 진리, 뜻, 길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라고 한 것입니다.

아주 알려진 이 구절을 우리는 쉽게 생각해왔습니다.

역시 원문 생경은 그냥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헤 피스티스)'이라고 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그 믿음입니다.

사도들은 이것을 정확히 구별하여 나누고 있음을 이제는 깨달아야 합니다.

앞으로 더욱 깊이 나누겠지만 성경의 믿음은 우리의 지식이나 확신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그것의 근거는 아버지와 아들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들의 믿음'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그 믿음'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이 세상의 '초등학문', 초등 교사'라는 '젖이나 먹는 아린 아이'의

믿음과 수준에 갇힐 것(갈3:23)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전하시고 인전하시는 '그 믿음'의 수준을 알고 그것에 이르러야 '그의 안식'에

들어 가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인정하시는 '그 믿음(헤 피스티스)는 우리가 가진 진리의 지식, 가르침의 확신이나 

동의가 아니라 진정한 '들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 역시 '테 아코에스(그 들음)'입니다.

바로 이사야나 구약의 믿음의 증인들이 하나님으로 부터 들었던 '그 들은 것', '복음'을 

온전히 깨닫고 그 길에 순종할 때, 비로서 '안식'에 이르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어떤 이들에게 걸림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이 온전한 들음, 그 믿음에 이르지 못해서 

약속을 받은 안식에 이르지 못했음을 생각할 때 주목할 가치가 있는 말씀입니다.

제가 처음부터 이것을 나누는 것은 바로 이것이 '생육. 번성. 충만'의 축복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있어야 창조의 완성인 일곱째 날의 '안식'에 들어 가듯이 진정한 '믿음(그 들음)'이 있어야

'그의 안식에 들어감'(히4:1,2)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동일한 본질들입니다.



 

 

 

 

 

 


온유온건온… (182.♡.0.52)
답답했던 마음, 영적인 갈급함에 메말라있던 제게 감독님 글과 동영상이 샘물처럼 시원함을 줍니다. 책을 보던 중 우연히 표지 앞 홈피주소를 찾아 이곳에 왔어요.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있어요.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