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세계의 반유대주의는 탈유대화(Dejudaization)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것은 유대적인 모든 요소를 분리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유대적 요소들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었다. 탈유대화의 역사적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유대 절기와의 분리
기원 후 325년 유대인들이 배제된 가운데 열렸던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 중 하나는 ‘유대 달력에서의 독립’이었다. 이것은 교회의 절기인 ‘부활절(Easter)’을 어떻게 계산하느냐의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부활절은 유월절(무교절), 초실절과 연결되는 절기이다. 교회에서는 부활절을 이 유대의 절기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유대 달력의 유월절은 니산월 14일이고 이것이 춘분과 일치해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춘분과 일치하지 않는 잘못된 달력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맞추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니케아 공의회는 부활절을 유대인의 달력의 절기와 분리시켰고 이것으로 부활절과 다른 모든 교회의 절기들은 성경에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리고 유대인들이 지키고 있는 절기들과 다른 날짜에 지켜지게 되었다.
유대인의 추방과 학살
유럽의 카톨릭 교회는 12세기부터 ‘이교도’를 심판하는 ‘종교 재판’을 시작했다. 종교재판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도 있었는데 이 두 나라는 중세 후기에 이슬람과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여러 영토를 포함하고 있었다.
14세기 말에 스페인의 일부 지역에서 폭력적인 반유대주의 경향이 있었다. 1391년 세비야에서는 수백 명의 유대인이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회당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 유대인 학살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하게 되었다. 그리고 1492년에는 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모두 스페인에서 쫓겨났고 카톨릭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까지 이교도로 취급되어 종교 재판을 받았다.
포르투갈의 종교 재판은 1536년에 포르투갈의 왕의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포르투갈 종교 재판은 ‘세파르딕 유대인들(Sephardic Jews)’을 대상으로 행해졌다. 세파르딕 유대인은 15세기 경에 스페인 또는 포르투갈을 포함한 이베리아 반도에 거주했던 유대인을 말한다.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받았다. 스페인의 종교 재판으로 1492년에 스페인에서 쫓겨난 많은 유대인들이 포르투갈로 옮겨갔는데 그들은 결국 그곳에서도 종교 재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교부들은 유대인에 대한 적대적 발언을 했는데 교회사에서 잘 알려진 크리소스톰, 유세비우스, 오리겐, 키를로스 뿐만 아니라 종교 개혁의 아버지인 마틴 루터도 여기에 포함된다. 마틴 루터는 죽기 며칠 전에 이런 설교를 했다.
유대인들은 가장 심한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들의 회당들은 부서져야 하고 그들의 집은 무너져야 한다. 그들은 추방되어 집시들과 같이 텐트에서 살아야 한다. 그들의 종교적 문헌(구약과 탈무드)는 없어져야 한다. 랍비들이 토라를 가르치는 것을 금해야 한다. 그들은 어떤 신앙적 고백도 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는 오직 가장 고생스러운 일만이 주어져야 한다. 그들의 재산은 몰수해야 한다. …
유대인의 마음은 막대기 같이, 돌 같이, 쇠 같이, 악마와 같이 굳었다.
유명한 역사학자인 윌리엄 쉬러는 그의 저서에서 독일 교회가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의 두 가지 요인 중 하나는 루터의 반유대적 발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 문헌의 소멸
가장 잘 알려진 유대인들의 문헌으로 탈무드가 있다. 탈무드는 기원 후 3세기까지 랍비들의 구전 율법을 정리한 미쉬나와 기원 후 6세기에 작성된, 미쉬나에 대한 주석인 게마라로 이루어졌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성문 율법인 토라와 함께 구전 율법을 같이 받았다고 믿고 이 두 가지 모두를 하나님이 주신 율법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카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인 니코랄스 도닌은 1236년에 교황 그레고리 9세에게 탈무드를 고발하는 35개의 조항에 대한 메모를 제출했다. 그 중에는 탈무드가 예수님과 마리아에 대한 신성 모독과 교회를 공격하며 이방인에 대한 적대감 나타낸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유대인들이 성경보다 구전 율법을 더 신성하게 여기며 이것은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레고리 교황은 프랑스 안의 교회들에게 서신을 보내 1240년에 토요일, 유대인들의 안식일에 그들이 회당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에 유대 문헌을 몰수하도록 했다. 그리고 히브리어로 된 책을 갖고 있으나 그것을 몰수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추방시켰다. 그는 또 고발된 내용과 같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거나 이런 종류의 책은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와 비슷한 명령을 프랑스,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의 왕에 의하여 내려졌다. 그리하여 1242년 6월, 마차 24개에 가득 실린 일만 권에 이르는 유대 문헌이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이 문헌들의 사본은 로마로 수탈되거나 로마에서 파기되었다.
유럽 각국의 주교들은 계속해서 탈무드를 불태울 것을 명령했다. 유대 문헌을 불태우는 움직임은 프랑스 이외에도 영국, 남부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서도 일어났다.
주교들이 명령한 것은 탈무드를 불태우는 것이었지만 대부분이 히브리어를 알지 못했던 그들은 히브리어로 된 모든 책들을 보이는대로 불태웠을 것이다. 15세기 중반에 프랑스에서 불에 타서 소멸된 히브리어로 된 문서 중에는 마지막 남은 히브리어 마태복음 원본이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서구 세계의 반유대주의라는 큰 파도 속에서 복음서와 신약 성경의 히브리어 원본이 단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 지금 우리에게 히브리어로 기록된 신약 성경의 원본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 것이 설명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