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

그의 길을 따르다(2)-베들레헴

  • 김우현
  • 조회 4262
  • 2014.01.30 10:44

2.

 

 

 

 

대부분 예수님의 공생애를 생각하면 ‘갈릴리’를 떠 올린다. 

당연히 메시아(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대부분 갈릴리에서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이다. 

예수님의 생애 후반은 예루살렘에 집중되어 있고 거기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 주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에 먼저 집중하였다. 

대부분 베들레헴 하면 예수님의 탄생하신 장소라는 것 외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너무나 짧고 작은 시간을 보내신 곳이다.

심지어 자라신 ‘나사렛’을 고향으로 여길 정도이다.

그래서 주님을 ‘나사렛 예수’라 부른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골2:9)’고

증거 하였다.

나는 이 구절을 처음 깨달았을 때 전율을 느꼈다.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모든 삶의 궤적에 ‘하나님의 신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메시아로서의 공생애 기간만이 아니라 이 땅에 태어나셨을 때부터

하나님의 영광과 비밀을 품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그동안 이것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사야는 이렇게 대언하였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사9:6

 

 

‘한 아기’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이 ‘기묘’이고 ‘모사’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안에 영원히 존재하시는 ‘지존자 하나님’이 거하신다.

이것은 얼마나 놀랍고 엄청난 선언인가?

성경과 히브리인들에게 ‘이름’은 가장 실제적인 ‘본질’을 의미한다.

사도 요한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고 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그 이름’을 믿는 것이다.

하나의 아이로 태어나신 예수님의 이름, 본질이 이토록 놀랍고 엄청나다는 것을

깊이 주목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에 처음 예수님의 여정을 촬영하러 갔을 때 많은 자료들을 찾았다. 

이미 방송에서 수많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책과 자료를 찾는 것은 체질이 되었다. 

그러나 아주 표피적인 성지에 대한 정보 외에 깊은 영적 의미를 다룬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놀랄 정도로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것이 의문이었다. 

왜 이 놀라운 성경의 예언을 증명하는 연구나 자료는 없는가?

그래서 진리의 성령님께 깨닫게 해주시기를 구했다.

‘기묘’라는 말의 원어는 ‘페레’이다.

이것은 ‘놀랍도록 기이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 하나 만으로도 아기 예수님과 그의 생애는 놀라운 비밀의 보화임을 알게 한다.

나는 베들레헴에 감추인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너무나 알고 싶었다.

그러나 대부분 ‘다윗의 고향’이기에 거기에서 태어났다는 식이다.

그리고 미가의 예언(미5:2)에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도 아는 정보였다.

물론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예언되었으니 그것도 중요한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그것이 놀랍도록 기이한 하나님의 비밀인가?

예수님의 여정은 처음부터 내게 의문만 가득 안겨 주었다. 

처음 베들레헴에 갔을 때, 기대와는 달리 낯선 풍경에 당황했었다.

워낙 테러가 많았던 시절이라 이스라엘 정부가 쳐놓은 거대한 분리장벽이

가장 먼저 맞이했다.

옛날 목동들이 양을 쳤다는 ‘목자들의 들판 교회’와 ‘예수탄생 교회’만이 순례자들로

북적 일뿐 그 어떤 영적인 의미를 전해주는 풍경이나 근거를 만나지 못했다.

아기 탄생 교회는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세운 것이다.

물론 이 장소가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는 근거는 없다.

예수님과 연관된 성지의 많은 것들이 역사적 실제와는 무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처음 지어진 기념교회의 바닥이 발굴되어졌는데 자세히 보니 태양신 숭배사상인

‘미트라교’의 문양을 디자인한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가 미트라 신봉자 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성지 순례자들은 이 장소를 방문하고 거대한 건물의 외양과 

장식들에 눈과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아무런 하나님의 신성과 영광, 언약의 비밀은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계속 베들레헴에 감추인 비밀을 깨닫게 해달라고 남모르게 구했다.

그러자 이상하게 또 다른 의문이 계속 솟아나 나를 지배했다.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아니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는가?’

갈수록 태산이었다.

아직 베들레헴에 대한 질문도 해소되지 않았는데 또 다른 문제가 쓰나미처럼

밀려 온 것이다.

나의 체질은 한번 질문에 묶이면 그것을 풀리기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스스로 그것을 ‘불독 스피릿’이라 이름 붙였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사40:1,2

 

 

이것은 메시아(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예언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는 것으로 계시되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경건한 ‘시므온’을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눅2:25)라고 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구약에 예언 된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가져 온다는 것은

곧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는 자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사나운 들짐승같은 이방인들에게 침략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고통을 맛보았다.

그리고 포로로 사로잡혀가 무거운 멍에와 눈물의 떡을 먹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회복을 약속하셨다.

그것은 메시아(기름부음 받은 자)를 보내어 구원하시고 위로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루살렘의 위로'이다. 

진정한 이스라엘의 목자, 왕의 이름은 ‘다윗의 자손’이라 하셨다.

메시아를 통해서 다윗의 왕권을 다시 회복하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들레헴은 다윗과 의미가 연결된다.

하지만 왜 작고 외진 베들레헴인가?

메시아가 회복하고 통치할 곳은 예루살렘이다.

나는 아무도 생각지 않는 그런 의문에 붙잡혀 홀로서 탐구와 기도를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갈망할 때에 먼저 ‘질문’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성경은 화석화된 문자에 갇히거나 닫힌 구조가 아니다.

우리는 대부분 진리의 표피적인 문자를 깨닫고 이해할 뿐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알아 온 어떤 성경적 지식과 상식의 고정된 구조를 막연히

받아들이고 산다.

그것이 성경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신 하나님은 영(요4:24)이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후3:6

 

'새 언약’의 일꾼은 ‘의문’, 곧 ‘문자(letter)’가 아닌 ‘영(spirit)’으로 행하는 자이다. 

성경의 구조는 '표면적인 문자'가 있고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영의 본질을 아는 자들이다. 

진실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동역하기를 꿈꾸는 제자들은 이것을 주목해야 한다. 

‘영(spirit)'이란 추상적이고 부정적인 의미의 신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장 구체적인 본질이고 비밀이요 마음이다.

이 ‘영’은 말씀에 대한 진실한 질문을 가진 자들에게 반응한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요4:24)’임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참되다’는 말은 헬라어로 ‘알레디노스’이다.

그러나 주님은 헬라어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아람어나 히브리어로 말씀하신 것이다.

‘참되게’의 히브리어는 ‘에메트’나 ‘야싸르’이다.

이것은 주로  ‘진실하게’로 번역되나 사실은 ‘진리에 합당하게’라는 의미이다.

히브리어로 ‘진리’는 곧 ‘에메트’이다.

바울은 그것을 ‘영적 예배’(롬12:2)라 하였다.

‘영적’이란 헬라어는 ‘로기켄’이다.

그것은 ‘로고스’, 곧 ‘말씀의 본질에 합당한’이라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영적인 예배는 ‘말씀의 본질을 구하는 것’이다.

나는 후에 사마리아에 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서 이 비밀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4

 

이것이 예수님께서 드리신 ‘영적 예배’이다. 

그냥 무조건 열심과 충성으로 행하신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그것에 철저히 순복하시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께서 습관을 따라 ‘에레모스’에서 기도하신 것이 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모든 비밀과 뜻을 알고 오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과 성정을 가진 아기로 오셔서 유대인들처럼 자라시고 배우시고  

지혜와 말씀과 영적인 크기가 성장하신 것이다(눅2:52).

나는 감람산의 겟세마네에 갈 때마다 주님의 간구를 다시 심장에 새기고

되새김질 했다.

‘겟세마네’는 ‘기름을 짜는 틀’이다.

하나님의 성전에 등불(메노라)을 밝히는 ‘순전한 기름’은 깨끗한 올리브 첫 열매를 

강한 압착으로 으깨어 짜내는 것이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자신의 ‘자아’, ‘생각의 뜻’을 철저히 부서뜨리는 모범을 

보여주셨다.

“아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막14:36).

이것이 진정한 기름부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적 예배이며 그리스도의 여정이다.

바로 이것이 새 언약의 일꾼의 본질인 ‘영으로 하는 것’이다.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기에 나는 표면의 문자 안에  

숨겨진 영의 비밀을 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 마음이다.

그런데 그 질문조차 진리의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나의 학생 시절을 돌아보면 가장 독특한 것이 거의 한번도

질문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질문을 심하게 자주하는 아이들을 약간은 비웃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진리의 성령님께 예수님의 길의 의미를 구할 때에 갑자기 질문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진리의 전통과 지식들, 무수한 체험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질문하고 더 깊고 완전한 아버지의 뜻을, 하늘의 비밀을

묻고 구해야 한다. 

이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자아’를 부인하는 것이며 우리 안의 ‘누룩’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스라엘에 와서 가장 독특한 경험 중 하나는 그렇게 수건에 가려진 것처럼

열리지 않던 모세 5경이 영적으로 읽히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출애굽 당시 유월절에 “내 얼굴 앞에서 누룩을 보이지 않게 하라”(출13:7)는

말씀의 의미가 강하게 다가왔다.

심지어는 이스라엘 온 땅에서 누룩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 땅에서 추방시키신다는

강한 명령을 주셨다.

나는 이것 역시 의문이었다.

표면적으로 이것을 읽으면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너무 엄격하고 율법적이며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분이시다.

그러나 이것의 ‘영’은 놀라운 것이었다.

‘누룩’은 ‘오래 묵은 것’이다.

빵조각이나 가루를 묵혀서 발효시킨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 그 형상의 본질은 항상 새로운 것이다.

끝없이 신선한 본질을 추구하지 않으면 자아나 옛 사람에 갇히게 된다.

거기에 불법의 영인 사단의 틈입이 생기고 결국 영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영'으로 돌아 가면 문자 안에 놀랍고 애절한 아버지의 마음, 사랑을 만지게 된다. 

하나님의 모든 진리와 열심은 우리의 행복이며 축복과 연결되어 있다. 

진리의 표면, 묵은 정보나 지식에 멈추어 있으면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 넓이를 누릴 수가 없다.

 그래서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고 명령하셨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고 그 길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아’의 부인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실제가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여정 안에 계시된 하늘 풍경을 알고자 하는 나에게 가장 먼저 준비되어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날마다’는 ‘헤메라’라는 헬라어를 쓴다. 

이것의 히브리어는 ‘욤’으로 주로 ‘일출에서 일몰까지’를 의미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 글과 언어를 배우는 작은 아이처럼 영적인 질문을 했다. 

먼저 깨달아진 것은 하나님의 종인 레위 제사장들은 매일 성전에서 두번의 제사를 드렸다.  

아침에 '상번제'로 어린 양이나 제물을 드리고 저녁에도 '하번제'로 그렇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매일 드리는 제사'를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날마다, 하루의 시작과 끝에 자기를 죽이고 부인하며 아버지의 얼굴 앞으로  

나올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들어가면 율법은 놀라운 비밀이 된다.   

뜻밖에도 이것의 단서를 ‘십자가’라는 말에서 또 발견하였다. 

예수님의 길에 감추어진 비밀을 간절히 구할 때에 진리의 성령께서 열어 주신 또 하나의

것은 말씀을 원어로 살피는 안목이다.

그것은 무슨 신학적이고 현학적인 제스처를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현대의 언어와 문화적 감각으로 번역된 말씀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시대, 언어, 문화, 역사를 무시하지 않고 쓰여졌다.

그래서 당시의 문화, 역사적 배경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갑자기 이 부분에 대한 많은 정보와 자료들을 얻게 되었다.  

'십자가'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타우로스’이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떠올리지만 본래 의미는 ‘장대’이다. 

고대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장막을 칠 때나 울타리 등에 사용하던 곧은 나무,

막대기를 일컫는 용어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고 하셨을 때 그는 스타우로스를

철거하고 그것을 짊어지고 가야만 했다.

고대 중동에서 장대를 지고 가는 것은 유목인들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광야의 목자들은 철을 따라서 양들에게 공급해야 하는 '푸른 초장'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것은 '선하신 목자'인 예수님의 길이었다.

당시의 집은 장막이었으므로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그 오래된, 묵은 집의 구조를

완전히 해체하고 장대들을 지고 이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의 원영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순종조차 자신을 부인하고 철저히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아무리 멋지고, 안전해 보이는 집의 구조일지라도 언제든지 해체하고

말씀의 본질적 명령을 따라서 이동해야 한다. 

주님은 '날마다'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나는 그 음성을 듣고 심령에 새겼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목자의 음성이 들리고 그것을 순전하게 따르는 삶의 실제가 열릴 때에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이전에 알았거나 새롭게 깨달은 것일지라도 날마다, 매일 그 안에 누룩을 제거해 

달라고 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전에 없던 매우 새로운 기름부음이었으며 내 삶을 체질적으로 뒤바꾸는 것이었다. 

나는 치열하게 예수님의 여정에 감추인 하늘의 보화를 알고자 구했다.

그런데 진리의 성령님은 먼저 이 체질을 만드셔서  진정으로 영으로 들어 가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오래 묵은 것을 상징하는 누룩을 제거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길을 탐구하기로 작정했을 때, 진리의 성령께서 내게 일으킨 가장

혁명적인 변화가 그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알던 상식들, 지식들의 해체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체질과는 다른 끝없는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내 안에 누룩이 제거되고 나를 부인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자 자아에 막혔던  

내 안의 생수가 터지며 말씀에 대한 질문들과 갈증이 증폭된 것이다.

말씀은 영적인 질문을 할 때에 비밀을 열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표면적인 것에서 우리의 삶에 유익한 교훈을 깨닫고 작용하는  

그것에 만족한다.

바울은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3:5)고 강조한다.

진정한 만족과 충일함은 우리의 자각과 사역, 체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 아버지의 마음을 기초로 하는 본질적 계시라는 사건 속에

들어 갈 때 채워진다.

이 하나님의 만족(영)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그동안 나는 당연히 예수님은 베들레헴에 탄생하셨다는 표면적, 문자적인

정보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것 이상의 놀라운 하늘의 비밀이 있음을 열어 주셨다.

 

김우현 (211.♡.29.188)
명절 기간에 다시 예수님의 여정을 되새김질 합니다.
우리가 그 무엇을 하든지 결코 집중력을 잃어서는 안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불법의 영들은 교묘함으로 이 본질, 주님의 영과 철저히
하나되는 것을 흐트러뜨립니다.
보기에 먹음직, 그럴듯하게 포장된 것으로 미혹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시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권능 (118.♡.3.58)
글을 읽으면서 감탄의 연속이였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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