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

그의 길을 따르다(3)-베들레헴

  • 김우현
  • 조회 3741
  • 2014.01.31 11:34

3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마2:4-6

 

 

헤롯 때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나시자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 왔다. 

당시 ‘동방’은 ‘페르샤’지역을 가리키고 그들은 고대의 점성학자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하늘의 별을 보고 ‘때’를 연구하고 맞추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성경이나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하나님의 징조를 아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이미 창세기의 시작부터 ‘해와 달과 별’들을 지으시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창1:14)고 명하셨다.

‘징조’는 히브리어로 ‘오트’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때’를 알리는 가장 중요한

‘표적(sign)'이다.

‘계절’은 놀랍게도 ‘모에드’로서 유월절, 나팔절, 초막절같은 ‘절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절기는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을 말하는 것이고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시는 하늘의 역사를 계시하는 것이다.

나는 오래전 방송에서 ‘잊혀진 성경의 땅, 고대 페르샤’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하여 동방의 지역들을 찾아 갔었다.

그런 가운데 발견한 것은 고대 바빌론이나 페르샤 제국에서 ‘박수의 장’으로

알려진 ‘다니엘’의 위상이 매우 높다는 것이었다.

무수한 자료들을 찾고 박물관과 고고학적 현장, 그리고 인터뷰를 통해서

‘동방의 박사들’은 다니엘을 추종하는 후예들이란 개인적인 결론을 얻었다.

이들은 다니엘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깊이 연구하던 자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 이방의 점성술사들이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알려주는 별을

보고 머나먼 길을 찾아 올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의 역사, 예수님의 여정에 대한 이해는 매우

협소하고 표피적인 문자와 정보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헤롯은 그들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러 왔다고 하자 즉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소집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인식되었다.

두려움을 느낀 헤롯이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물었을 때에 그들은

미가의 이 예언으로 답을 했다.

당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배만이 아니라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외우고

기록하는 전문가들이다.

그들의 열심은 우리가 따라 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로마의 지배하에서 메시아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다스릴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또 의문에 빠졌다.

왜 이 서기관들은 메시아를 갈망하는데 동방박사의 말을 듣고도 베들레헴에

찾아 가지 않는가?

이것은 엉뚱한 상상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헤롯조차 동방 박사의 말을 듣자마자 자기의 안위를 위해서 아주 자세히 묻고

즉각적으로 베들레헴에 군사를 보내어 태어난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마2:16).

그런데 하나님의 서기관들이 메시아가 거기서 나오는 것이 확실하다면 왜

찾아 가서 누가 태어났는지 살펴볼 생각을 하지 않는가?

성경에는 누구도 그렇게 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것은 단순한 것 같지만 아주 미묘한 부분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메시아를 갈망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같은 그룹들은 성경 연구 뿐 아니라 율법의

규례에 따라 성전의 예배에 철저하고 열심이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메시아를 기다린 것이 아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도다

마15:7-9

 

정확히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 이었던 것이다. 

‘외식’이라는 헬라어를 찾아보았다.

그것은 ‘휘포크리테스’인데 당시 로마의 야외극장에서 하얗게 분장을 하고

연극을 하던 배우들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것은 진정한 모습이 아닌 배우처럼 치장하고 꾸며진 외적인 모습과 잔뜩 과장한

외침과 선포에 묶인 상황을 가리킨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성전에서는 ‘히브리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예수님도 갈릴리나 사마리아 같은 이방과 접했던 지역에서는 ‘아람어’를, 예루살렘에서는

히브리어를 사용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쓰는 히브리어로 말씀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휘포크리테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찾아보니 ‘하프네’였다.

구약 성경에서 이것은 진정으로 ‘경건하지 않은 자’(욥34:30)를 의미하고

‘두 마음을 가진 자’, ‘거짓 입술을 가진 자’(시12:2)로 표현되고 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가장 신앙이 좋은 경건한 자들이라 착각하였다.

매일, 열정적으로 기도와 찬양과 성경 연구에 열심을 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외형적인 경건, 자기들의 열심, 고백과 선포에 스스로 속은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주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을 증명한다고 착각한 것이다.

자신의 자리, 안위와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에 급급하여 헤롯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정도의 신앙에 갇힌 것을 알지 못했다.

이 미묘한 착각과 외식을 분별해야 한다.

예수님의 여정을 탐구하면서 계속 그 길에 대비되고 반대되는 이 외식하는 자들의

길을 만나게 되었다.

예전에는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는 불의한 자들의 삶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진실로 나를 부인하고 끝없이 누룩을 제거하기를 구하자 이것이 바로

내가 가진 영적인 모습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아주 잘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나는 이것과 대비되는 고대의 풍경을 하나 떠 올렸다.

헤롯과 대비되는 인물이 애굽의 바로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강성해지자 ‘사내아기’를 낳으면 다 죽이라고 히브리의

‘산파’들에게 명령했다.

그 당시 바로는 헤롯보다 훨씬 강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그러나 히브리의 산파들은 그 말에 어찌했겠는가?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출1:7

 

이것은 정말 놀라운 것이다. 

절대 군주인 왕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한 것이다.

이것은 목숨을 담보하는 일이었다.

‘두려워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레’이다.

그것은 어떤 상황, 조직에 눌린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경외하다’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진정한 ‘경건’은 외적인 형식을 넘어서서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함’을

말한다.

진정한 경건과 경외함은 자신이나 사람의 말에 움직이는지 아니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온 맘과 뜻으로 반응하는지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내 삶에서 이것을 철저히 분별해야 한다.

이스라엘로 인도되어 주님의 길을 탐구하면서 나는 이 부분에서 처절히

깨지고 점검을 받게 되었다.

만일 서기관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음성과 예언,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이었다면 당장 베들레헴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깊이 듣는 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판해 왔다.

그러나 예수님의 여정을 연구하면서 오히려 그들에게서 많은 도전과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들은 내게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성경에서 그들을 책망하고 훈계하는 것들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당한 일들 말세를 당한 우리의 ‘본보기’로

기록된 것이라 하였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10:11,12

 

 

나는 이 교훈을 심령에 깊이 새겼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보여준 그 패역과 불경건, 외식의 모습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가르침이라는 것에 집중하였다.

솔직히 그것은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예수님의 여정을 연구하며 내 자신의 허위와 무지, 잘못된 길들을 무수히

깨닫게 되었다.

바로 내가 ‘서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자’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주 넘어지고 패역하고 불순종한 유대인들의 삶을

성경에 치밀하게 기록하신 것은 바로 우리의 거울이 되게 하고 훈계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우리 자신을 치밀하게 비워 보지 않고 비판의 도구로

사용해 왔다.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 전체에서 ‘훈계’는 진정으로 자식을 위하는 아버지의 사랑이요 생명길로

나아가게 하는 길로 가르친다.

그리고 ‘훈계’를 사랑할 때에 ‘지혜’를 얻는다(잠8:33).

아비의 강한 ‘징계’가 없거나 그것을 듣지 않는 영적인 삶은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라고까지 하신다(히1·2:8).

아버지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 자체가 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것에 유익함‘(딤후3:16)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의 삶에서 ‘교훈’을 받아야 한다.

나는 예수님의 길을 연구하며 거기서 훈계를 얻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치열하게 나의 모습, 나를 책망하는 교훈을

발견하지 않는다.

늘 모여 예배하고,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니 당연히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날마다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스스로의 외적인 모양과 조직, 익숙한 틀에서 만족하면 안된다.

날마다 돌아보고 진정으로 아버지의 뜻과 의에 합당한지 진리의 성령님께

분별의 능력과 안목을 구해야 한다.

나는 또 다시 거기서 귀한 것을 배웠다.

예수님 당시에 그리스도의 ‘베들레헴 탄생’은 보편적인 지식이었다.

유월절이나 오순절, 초막절같은 절기에 ‘관습’을 따라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주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과 능력을 그들에게 나타내셨다.

그것만으로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닌가 충분히 생각할

만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가르치시고

권능으로 치유하시자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라고 물었다(요10:24).

그러나 주님은 “내가 아버지의 미름으로 행하는 이 일들이 그 증거다”

라고 답하셨다.

당시 유대의 지도자들도 예수님이 혹시 기다리던 그분이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자기들이 알고 있던 성경의 정보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요7:40-43

 

이것은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말씀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 오시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았지만

‘갈릴리’에 대한 인식은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갈릴리’에서 대부분 사역을 하신 것이다.

당시에도 갈릴리를 기반으로 절기에만 예루살렘에 올라 오셨던 것이다.

그들에게 걸림돌이 된 것은 왜 그리스도가 나사렛이나 갈릴리에서 행하느냐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연히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큰 빛’이 ‘이방의 갈릴리’에 비췰 것이란 예언(사9:1,2)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큰 문제였다.

왜냐하면 ‘갈릴리’는 메시아와 연관이 없는 ‘이방의 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해석도 우리와 다르다.

나 역시 이것이 의문이었다.

메시아가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나는 ‘베들레헴’만이 아니라 이 의문을 붙들고 수많은 시간을 탐구에 몰두했다.

나는 단지 예수님의 길을, 그 여정 가운데 있는 하늘의 비밀을 깊이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길로 가면 갈수록 나는 오히려 무수한 의문과 구조적인

문제들에 집착하게 되었다.

다섯 번 째 이스라엘에 갔을 때, 나는 성령님의 방향을 깨닫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여정은 그분만의 길이 아니다.

그분의 몸인 교회, 제자, 신부들의 여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거기엔 우리를 위한 깊은 아버지의 뜻, 교훈이 스며있는 것이다.

우리를 하늘의 의(義)로 교육하시기 위한 아버지의 마음이 만져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아들은 당연히 갈릴리에서 행하셔야만 했다.

이사야의 예언만이 아니라 그것을 증명하는 무수한 근거가 성경에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이 그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예비하신 은밀한

지혜’를 그 시대의 관원들이 하나도 깨닫지 못했다고 탄식했다(고전2:7,8).

그렇게 성경을 연구했던 박사들이 말이다.

이것은 나에게도 큰 도전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의 길을 깨닫고 있는가?

이 감추인 하나님의 지혜와 신성의 영광을 알고 있는가?

지금 우리도 그 어느 때 보다 주님의 재림에 열망이 큰 시대를 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시 오실 주님을 뜨겁게 사모하는 것처럼 보인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재림’에 대하여 나누는 것조차 ‘금기’처럼 여겨졌는데

요즘은 누구나 구호처럼 외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도 그런 열정과 외피적인 형식에 속으면 안된다.

그것이 우리의 영적인 본질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재림의 구호만 키우고 외적인 종말의 현상에 치우치고 있다.

마지막 때에 대하여 무수한 연구와 담론이 있으나 익히 알려진 전통적인 교훈이나

진정으로 성경이 말하지 않는 자극적인 현상적 해석이 난무하고 있다.

나는 예수님의 탄생과 그 구조들을 탐구하면서 오늘 우리 시대와 매우 유사한

풍경들을 느꼈다.

나는 계속해서 나를 부인하고 성령님께 가르침을 구할 뿐이었다.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계19:10

 

'증언’이라는 말은 ‘마르튀리아’, 예수님이  '말씀으로 육신이 되셔서' 행하시고 가르치시고  

걸어가신 모든 삶을 의미한다. 

그것은 놀랍게도 ‘예언의 영’인 것이다. 

새 언약의 일꾼들은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문자를 넘어 이 '영'을 읽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거기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예언하시는 ‘영적인 실제’를 읽어내야 한다. 

주님의 길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지금 우리 시대를 위한 깊은 아버지의 뜻과 하늘의 전략을  

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