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

그의 길을 따르다(5)-베들레헴

  • 김우현
  • 조회 4663
  • 2014.02.02 13:19

5.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창35:16-21

 

 

야곱은 형 에서와의 ‘장자권’사건으로 이삭의 장막을 떠나 ‘이방 땅’에 가서  

21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두 명의 신부와 자식들, 가축들을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서 멈추어야 했다.

왜냐하면 라헬이 거기서 갑자기 해산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야곱이 사랑한 여인 라헬의 진통은 너무나 심해서 아들을 낳자마자

안타깝게도 죽게 되었다.

자식을 낳고 제대로 기르지도 못하고 떠나야 하는 어미의 심정은 얼마나

아프고 비통했을 것인가?

그래서 라헬은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 곧 ‘슬픔의 아들’이라 지었다.

그런데 야곱은 그 이름이 아니라 다시 ‘베냐민’, 곧 ‘오른 손의 아들‘이라 바꾸었다.

이것이 성경에서 가장 처음 나타나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의 사건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에 연결되는 가장 근본적인 영적 풍경이다.

지금도 분리 장벽 지나자마자 베들레헴 입구에는 ‘라헬의 무덤 회당’이 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그리스도는 바로 이 사건 안에 깃들어 있는

‘예언의 영’과 깊이 연결되는 것이다.

라헬이 지은 ‘베노니(슬픔의 아들)’는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리고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아들‘을 의미한다.

스데반은 돌아 맞아 죽음을 당하면서 영적인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보았다(행7:56).

놀랍게도 이미 창세기의 베들레헴 사건에 ‘어린 양’으로 오시는 아들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하늘에 오르셔서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으로서의 메시아의 길을 이미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와 역사의 가장 독특하고 놀라운 특징은 영적인 원리와 그림을

‘미리 보여 주심(豫表)’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정말 말씀 그대로 ‘시초(레쉬트,창세기)’부터 ‘종말(아하리트, 메시아의 날)’을

미리 보이시고 알리신 것이다(사46:10).

우리는 메시아의 근본을 ‘상고(케뎀)’와 ‘영원’으로부터 찾으려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이것은 후에 세워질 이스라엘의 역사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중요한 원리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25:14)라고 노래했다.

‘친밀하심’이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쏘드’인데 그것은 ‘깊이 숨겨진 비밀의 차원’이다.

정통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가장 깊은 경지에 들어가 얻은 깨달음을 그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보여 주신다는 것이다.

다윗은 그런 이들이 바로 ‘온유한 자들’(시25:9)이라고 한다.

팔복에서 주께서 ‘땅’을 유업으로 얻는 온유한 자들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음성, 말씀을 듣는 귀와 거기에 복종된 상태를

가리킨다.

다윗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시25:12,13)라고 노래했다.

나는 이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모하고 탐구함으로 그분의

‘친밀하심’에 들어가기를 갈망하기로 했다.

아버지의 깊은 비밀의 지경에 너무나 들어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이 ‘경외함’, 곧 오직 ‘말씀에의 순종’에 집중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내게 있어 ‘땅의 유업’은 ‘예수님의 형상과 영광’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다.

베들레헴의 탐구는 내게 이전에 알지 못하던 놀라운 영적 유업과 언약의 땅을

열어 주었다.

후에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포로로 사로

잡혀 갈 때에 라헬이 통곡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렘31:15

 

예루살렘은 ‘베냐민 지파’의 지경이다. 

그들이 사로 잡혀 가며 옛 길로 갈 때에 베들레헴 지경의 무덤에서 라헬이

자식들이 끊어지는 것을 보고 애통한 것이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고 죽었기에 더 이상 자식을 보지 못했다.

그것이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라헬의 애통이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국모(國母)로서 후에 자손들이 당할 일들을 예언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 사건을 창세기의 사건과 연결하여 이해하고 있다.

이것이 성경이 가지는 언약적 연결고리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라헬에게 “그 눈물을 멈추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을 버려두시지 않고 다시 ‘대적의 땅’(렘31:6)에서 회복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베냐민’, ‘부활의 역사’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의 구원관은 매우 개인적이어서 메시아로서 예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와 의의 구조를 깊이 이해하기 어렵다.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7)는 예언은 정확히 메시아의 언약이다.

처음 제자들을 비롯한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구원의 관점은 이스라엘이 다시

혼돈과 공허, 흑암에서 해방되어 회복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이다.

에스겔을 통하여 아버지는 ‘이방에 끌려 간 백성들’을 회복하실 것을 약속하였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겔34:11,12

 

 

이 놀라운 예언은 바로 ‘이스라엘의 목자’와 ‘베들레헴’을 연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나운 들짐승’에 사로 잡힌

‘잃어버린 양들’이라 하셨다(겔34:8).

그것은 그들을 사랑하고 양육하는 진정한 목자가 없기 때문에 유리방황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친히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흩어진 모든 땅에서 반드시

찾아내시겠다는 것이다.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라는 말씀에서 나는 울컥하였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려는 아버지의 뜨거운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회복하기 위하여 세운 메시아의 이름이

바로 ‘다윗’이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34:23,24

 

'다윗’은 이 예언이 나오기 몇 백년 이전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종이요 왕인 ‘다윗’은 누구인가?

바로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극명한 메시아의 예언이었다.

이스라엘을 이방의 손에서 회복하고 다스리실 목자요 왕은 ‘다윗의 영광’을

가져오는 자이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나온 많은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9:35)하셨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을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정확히 에스겔 34장에 예언 된 언약을 아시고 순종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베들레헴 탄생과 연결된다.

그곳은 다윗의 고향 일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다시 돌아 와

푸른 초장에 눕는 풍경을 가진 땅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인근의 베들레헴과 에브라다는 유대 땅에서 양들을 키우던 지경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선한 목자’의 보호 아래서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에 누워 있는

상태를 ‘샬롬(평화)’이라고 부른다.

바로 그것이 평화의 왕인 메시아가 다스리시는 통치, 곧 ‘하나님 나라’였던 것이다.

이 풍경을 가진 땅이 바로 ‘베들레헴’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했다.

이것은 구약의 유대인들이 가장 소망하던 메시아를 통해 회복된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의’와 ‘평강(샬롬)’, ‘희락’이 주어지려면 ‘대적의 손’이

범접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서 ‘사나운 짐승’은 ‘이방의 세력들’을 상징한다.

다니엘 7장이나 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짐승들’은 모두 이스라엘을 사로 잡고

지배한 우상의 나라, 앗수르, 바벨론, 헬라, 로마같은 나라들이다.

왜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는가?

그곳은 바로 이런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고 구하는 목자의 언약적

풍경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삼상17:34,35

 

다윗이 거인 골리앗과 싸우고자 할 때에 사울이 너무 어리다고 말렸다. 

그 때 다윗은 베들레헴의 목자로서 자기가 했던 일들을 이렇게 말했다.

사나운 짐승들이 양들을 물로 가면 위험을 무릎 쓰고 따라가서 사자나 곰의

입에서 그것을 건져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님을 깨달았다.

‘다윗’은 가장 대표적인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질 메시아의 언약은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사55:3)라고 선언하셨다.

그리고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다”(사55:4)고 하셨다.

다윗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가져 오실 그리스도의 '증인‘이요

앞서서 그 길을 예표하는 ‘인도자’로 부르심을 입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베들레헴의 목자로서 짐승들로부터 양들을 구한 것은

예수님이 이루실 구원에 대한 매우 중요한 예언적인 그림이었다.

다윗은 양들을 위해서 목숨의 위험을 무릎 쓰고 구했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시는 분이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10:14,15

 

주님의 이 말씀은 다윗이 ‘베들레헴’에서 보여준 모형과 깊이 연결 되어 있다. 

‘사나운 짐승들’로 예표되는 현실의 이방의 세력들, 곧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로잡아 가는 정사와 권세들은 ‘사단의 왕국’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그것에서 백성들을 구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피를 흘리시고

기꺼이 목숨까지 내어 주신다.

그것으로 흑암의 구조를 깨트리고 잃어버린 양들을 구하시는 그림은 베들레헴의

다윗에게 연결된 것이다.

‘베들레헴 탄생’의 언약적인 배경에 이것이 중요하게 자리한다.

나는 그동안 왜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에 이것을 연결하여 읽어내지 못했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것 말고도 성경에 너무나 많은 역사들과 예언들이 베들레헴과 깊이 연결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진정으로 성령께서 열어 주시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진리의 성령님께 바울처럼 내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깊이 감추인 비밀(영)을 보게 해달라고 무수히 구하였다.

그러자 신기할 정도로 보이지 않던 새로운 비밀들이 새롭게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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