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

그의 길을 따르다(7)-베들레헴

  • 김우현
  • 조회 4695
  • 2014.02.02 14:14

 

 

 

그리스도의 베들레헴 탄생의 비밀에 매우 중요한 것이 ‘룻기’이다.  

왜냐하면 이방 여인 룻과 유대의 유력자 보아스와의 만남이 아루어 진 곳이

‘베들레헴’이며 거기서 ‘다윗’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과 연결될 뿐 아니라 메시아의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언약이다.

룻기는 사사들의 때에 유대 땅에 흉년이 들고 베들레헴에 살던 사람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이방에 갔다는 것(룻1:1)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다시 돌아 올 때는 ‘이방의 여인’과 ‘유다의 시어미’가 ‘하나’되어

메시아의 계보를 만든다.

나는 이 영적 그림에 주목하였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명과 교회의 비밀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남편인 ‘엘리멜렉’의 이름은 ‘왕이 되시는 하나님’(룻1:2)이다.

그리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병이 들다’는 뜻과 ‘쇠하다’는 의미이다.

누구든 자식들의 이름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지을 리가 없다.

이것은 당시 유대의 영적인 상황을 계시하는 것이다.

성경은 지명과 인명, 그리고 사건들 안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특징이 있다.

사도 바울이 간파했듯이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갖게 함”(딤후3:15)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도 표피적이고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된다.

룻기는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기에 이것은 당시의 영적 상태를 보여준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21:25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나고 룻기가 이어진다. 

그러므로 유대의 학자들은 룻기가 사사기의 연장이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되지 않는

상태를 가르치는 것이다.

‘왕이 없다’는 이 말은 사사기에서 반복하여 나오는 것인데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베들레헴’과 깊이 연관되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놓치지 않고 주목하였다.

사사기 17장6절에서 ‘당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고 각자의 소견대로 행했다’는

구절 다음에 ‘유다 베들레헴 출신 한 청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레위인’이었는데 거처를 찾다가 미가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제사장이 된다.

미가는 자기 어머니가 잃어버린 돈을 주워서 우상을 만들고 그것에 예배할

제사장을 찾다가 이 레위 청년을 만나서 받아 들인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나는 예전에 사사기를 공부할 때에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이 패역하고 무지한

레위인의 이야기를 왜 그렇게 길게 썼을까 의문을 가졌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베들레헴’을 연구하면서 이것이 깊은 연관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후에 이 미가의 집에 ‘단 지파’사람들이 쳐들어 와서 레위 청년들을 자신들의

제사장으로 데리고 한다.

결국 미가의 집에 있던 ‘우상들’은 단지파의 우상이 되어진다.

사사기 17,18장은 이 이야기를 아주 자세히, 길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19장부터는 역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 베들레헴 출신의 또 다른

‘레위인’과 그의 ‘첩’이야기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제사장이 첩을 두고 우상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그 시대의 죄악이었다.

이 레위인은 첩을 잊지 못해서 ‘베들레헴’에서 ‘여호와의 집’으로 데리고 가다가

기브아 땅에 이른다.

이 땅은 ‘베냐민 지경’이었다.

그곳에서 베냐민 사람들에게 레위의 첩은 능욕을 당하고 결국 죽고 만다.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 12지파 전체가 일어나 베냐민과 전쟁을 치루게 되고

무려 이만 오천 백명이나 죽게 되는 불행이 일어난다.

사사기는 이 내용을 매우 자세히 쓰고 있다.

그런데 계속 반복되는 말이 있다.

‘유다 베들레헴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창세기 39장에서 애굽에 팔려간 요셉의 이야기에는 여러번 반복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그의 옷’이라는 것이다.

애굽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자 그의 옷을 버려 두고

도망을 간다.

그런데 이 ‘요셉의 옷’에 대한 말이 이상할 정도로 자주 반복되는데

그것은 ‘히브리 사람의 옷’(창39:14)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성경에서 ‘옷’은 ‘정체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애굽에 팔려간 요셉이 ‘히브리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이방인’으로서

살아갈 것에 대한 예언적인 그림을 나타낸다.

정말 이 사건 이후에 요셉은 애굽인의 옷과 모습,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이것이 유대의 형제들에게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가

‘이방’으로 가서 히브리적인 정체성을 벗을 것에 대한 예언이라고 해석한다.

결국 다시 형제들을 만날 때, 그는 히브리어로 자신의 히브리적인 이름을

알려 준다.

지금은 이스라엘의 패역으로 ‘이방’으로 갔던 ‘그리스도’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시는 때이다.

이것은 ‘룻기’의 시대와 매우 흡사하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제사장등 유대의 지도자들을 징계하신

말씀들의 원형은 사사기의 '레위인들‘이 가졌던 죄악과 거의 같은 원형이다.

그것 때문에 엄청난 심판과 기근의 심판을 받고 이방으로 흩어져 버린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 오고 있다.

그것에 아주 중요한 증거가 ‘히브리적인 옷’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회복이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예수님의 재림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보여주는 예표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사기의 후반에 ‘유대 베들레헴’을 계속 기록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의도를나타내는 것이다.

이 베들레헴 출신의 ‘레위인’이 저지른 죄악은 이스라엘의 패역을 상징하는

‘기브아의 시대’로 불려 지게 된다.

 

그들은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부패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호9:9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더니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호10:9

 

'기브아의 시대’는 바로 사사기의 베들레헴 출신의 레위인으로 인한 죄악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불의’가 무엇인지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 사사기의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불의란 무엇인가?'를 가라치시려는 것이다. 

그것이 본질적인 죄악의 결과가 ‘흉년’을 가져 온 것이다. 

흉년과 기근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듣고 순종하지 않은 것에 대한

율법의 대표적인 저주(fp26:19,20)이다.

룻기는 그렇게 베들레헴으로 인한 죄악으로 시작되고 거기에 메시아의

계보가 결실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이 역사적 배경들은 이스라엘과 열방을 저주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에 대한

중요한 언약이 되는 것이다.

역시 ‘엘리멜렉’이 죽었다는 것은 ‘왕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주관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큰 이스라엘의 심판이다.

이들은 결국 흉년으로 이방에 흩어지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 전반에 걸친

하나의 원리와도 같다.

그들이 이방에 갔다가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것은 심판이 끝나고

다시 ‘이스라엘이 회복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연구하며 이전에 알지 못하던 예수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6-8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은 ‘이스라엘 회복’에 대하여 

물었다.

역시 유대인인 그들에게 메시아가 오셔서 이루실 역사는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오직 ‘아버지의 권한과 주권’이라 하셨다.

대신에 성령의 권능으로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 하셨다.

나오미의 가족들이 유대 땅을 떠나 거류한 곳이 이방 ‘모압’(룻1:1)이다.

나는 이것이 곧 ‘땅 끝’을 상징하는 것이라 깨닫게 되었다.

‘모압’은 소돔의 심판 때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롯’과 그의 딸들 사이에

근찬상간으로 태어난 자식이다(창19:37).

이 패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23:3)는 저주를 하셨다.

이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총회’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 곧 ‘땅 끝’을

상징하는 것이다.

‘총회’의 히브리어는 ‘카할’인데 이것은 신약에서 ‘에클레시아’ 곧 ‘교회’를

가리킨다.

룻기에서 유대의 가족들이 이방 모압에 거류하다가 다시 돌아 오는 것은

‘땅 끝’까지 흩어졌다가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는 예언인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때의 영적인 그림이다.

놀라운 것은 모압 출신의 여인 ‘룻’이 유대 땅으로 함께 들어가

하나님의 언약적 계보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의 저주’가 풀렸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너무나 놀랍고 위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3:13,14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시는 ‘베들레헴의 선한 목자’의 표상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의 사명이 바로 이 역사이다.

그리고 역시 베들레헴을 배경으로 하는 룻기의 본질적 예언도 그것이다.

이 주님의 구속의 역사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까지

미치는 놀라운 아버지의 은총인데 룻과 보아스의 만남이 그것이었다.

바울은 그것을 ‘아브라함의 복’이라 하였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아브라함의 축복으로 이끈다.

그것은 창세기 12장에서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2,3)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부르심을 입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인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모든 열방이 복을 얻는다고 약속하셨다.

성경에서 이것의 놀라운 결실이 베들레헴에서 룻을 통해 보여지는 것이다.

가장 저주 받은 이방의 여인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나오미를 축복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복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메시아의 계보에 들어가는 축복이다.

나는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을 연구하면서 전율할 정도로 크고 놀라운

'아버지의 마음‘을 만지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까지 이어지는 놀라운 축복의 원리가 된다.

바울은 이 축복의 보증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는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오순절’에 반드시 룻기를 읽는다.

그것은 룻기의 나오미와 룻이 이방의 모압 땅에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그 때가 ‘오순절’이었기 때문이다.

룻기는 그것을 ‘보리추수 시작할 때’(룻1:22)라 하였다.

이스라엘은 ‘오순절’즈음에 보리를 추수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순절에 처음 밀(보리)을 추수하여 만든 ‘떡 두덩이’를

제단에 바치도록 명하셨다(레23:17).

메시아닉 유대인들에 의하면 이 두 개의 떡은 ‘이스라엘과 이방‘을 상징한다.

오순절에 임하시는 ‘성령의 약속’은 ‘이스라엘과 이방’이 ‘하나’되는 것이다.

나는 ‘베들레헴’이란 이름의 의미를 깊이 묵상했다.

그것은 잘 알려진 대로 ‘떡집’이란 뜻이다.

예수님은 친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6:48)고 하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집’, 곧 ‘교회’를 상징한다.

구약에서 그것은 ‘카할’ 곧 ‘여호와의 총회’이다.

나는 최초로 세워진 ‘여호와의 총회’를 살펴 보았다.

그것은 바로 출애굽 후에 ‘시내산’에서 세워진 ‘이스라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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