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동안 지난번 예루살렘에서 촬영한 것을 편집했다.
친구 재완이와 오순절에 촬영한 <예수님의 여정>도 이렇게 시간을 들이지는 못했다.
그 때는 내레이션도 있고 15분 이상이고..이번엔 10분에 내레이션도 없다.
제목은 <샬롬, 예루살렘>...
주변에 나눈 것처럼 '정통 유대인들'을 촬영한 것이다.
첫 편집은 완벽하지 않아도 마음에 든다.
난 항상 분수를 지키려 해서 스트레스가 적다.
오늘은 그냥 자유로운 글을 쓸 것만 같다.
기분 탓인가?
이틀 동안 편집을 하면서 '나는 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인가?' 문득 생각했다.
정통 유대인들을 다루는 주제도 그렇고 ...이런 것을 해서 무슨 경제적 유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멀리 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내가 이스라엘에 가서 많은 재정과 시간..공을 들여서 촬영을 했다.
정통 유대인들에 대해서...
그들에 대한 교회의 닫힌 마음이 열리는 것에 작은 통로가 되기를 갈망하면서...
누구도 깊은 관심을 두지 않는 줴를 가지고...
그리고 아무런 댓가가 없이 나누기 위해 작업을 하는 것이다.
물론 내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글이든 무엇이든 '공치사'를 꺼리는 체질이다.
그래도 오늘 이런 그를 쓰는 것은 역시 무언가 나누려는 심산이다.
오늘 아침에 창41장에 나오는 '바로의 꿈'을 연구했다.
'살찐 암소 일곱 마리'가 애굽의 하수에서 올라 온다.
그리고 역시 '바싹 마르고 파리한 암소' 일곱 마리가 올라 와서 그것을 잡아 먹는다.
요셉은 이것이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보여 주는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이라고 해석한다.
물론 이것은 마지막 때에 아버지의 하시려는 일이다.
흉년이....엄청난 기근이 올 것이다.
아니, 이미 왔는지도 모른다.
아모스는 ...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암8:11-13
라고 예언했다.
분명히 바로의 꿈과 아모스의 예언은 서로 연결된다.
나는 몇 시간에 걸쳐 그것을 연구하면서 계속 왜 '기근'이 오는지를 생각했다.
대부분...알량하게 자기의 유익에 집착되고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얼 해도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려는 깊이와 넓이가 드물다.
우리의 역사와 현실...특히 진리의 체계는 그 구조를 가지지 못했다.
자기를 비우고...어린 아이가 되고....가난해지지 않으면 본질에 들어 가지 못한다.
진리의 본질...아버지의 뜻과 마음이...그 사랑이 열리지 못한다.
아니, 열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진리적 구조는 분간하기 힘드나 '자기 의와 유익'에 집중하게 한다.
<숨겨진 일>이란 책을 만든지 한달이 되어 간다.
그래도 외부에 아직 알리지 않았다.
주변에 알고 있는 소수와만 나눈 상태이다.
사실 이 책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내가 쓰긴 했지만 지난 여름 이스라엘에 갔을 때 깊은 기도 가운데 주신 영감을
바탕으로 연구하 것이다.
'시편에 감추인 아버지의 뜻'...그 예언의 구조를 깊이 탐구했다.
그런데 왜 그 책을 외부에 알리지 않는가?
먼저는 성령께서 나누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인 일들까지 다루고 있다.
물론 나는 시편에서 그것을 읽어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게 하신 이는 '진리의 성령'이시다.
나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령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는 중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예루살렘에서 이 말씀에 순종하여 간구할 때에...
'시편의 예언적 구조'가 열렸다.
그것은 성경에서 정확히 증거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다윗'을 가리켜 "그는 선지자라"(행2:30) 하였다.
다윗만이 아니라 그의 악사들도 다 하나님의 일을 미리 보는 '선견자'(대상25:1)였다.
시편의 중요 저자 중 하나인 '모세'역시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라"(신34:10)하였다.
그런데 왜 나누기를 꺼리는가?
그냥 내 마음에 이것의 원소스를 제공하신 성령께서(물론 쓰는 과정도 인도하셨다)
가장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시기를 먼저 바람이 마음이 컸다.
'나눔'에 '안식'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가장 좋고 부작용이 없다.
나는 그 책으 나 자신의 무엇을 알리려거나....사역적인 의미...재정적인 무엇을 의도하여
쓴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아버지가 하시려는 일'을 알리고 기도하는 영을 만들려고 쓴 것이다.
"큰 감동으로 읽었고 ..곧 만나 이 주제로 나누기를 원합니다"
존경하는 구약학자 K 교수님께서 읽은 소감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일단 인정할 만한 학자의 검증은 나로 안심하게 했다.
내가 외부에 적극적인 나누기를 꺼린 이유는 아직 이런 내용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정말 오늘은 이런 글을 쓰는 것을 보니....기분이....
이 글 역시 무언가를 나누려는 시도일 뿐이다.
예전에도 책을 쓰면 거의 대부부은 좋은 반응을 했지만...소수는 아주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비판이 매우 익숙한 이들이고 체질적이다.
우리 교회는 주님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비판의 영을 매우 키우는 진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나는 당연히 외부의 비판에 마음을 크게 쓰지도 않고 반응하지 않는다.
그것이 말씀이 요구하는 삶이다.
그런데 문제는 비판을 하는 이들의 삶이 매우 핍절해 진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잘 모르지만....그들의 영은 파리하고 수척해지는 것을 항상 느낀다.
예수님께서 비판하는 영은 그것으로 도로 판단과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어릴적 부터 자기들만의 의의 구조를 가지고 가하게 비판하는 그룹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 나름대로는 깊은 지식과 남들과 다른 지식, 깨달음, 헌신에 선 것을 인정한다.
문제는 그들이 시간이 흐르면 점점 '흉년'에 빠진다는 것이다.
특히 진리의 문제..성령님의 문제로 비판하는 영은 너무나 극한 영적 기근에 빠져 들어간다.
나의 망설임은 내가 쓴 책이 그들에게 비판의 빌미와 영적 기근..흉년을 제공할까봐 그렇다.
아아...이런 이상하 생각은 주제넘은 것인가?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써야 겠다.
정말 기분 탓인가 보다...이런 글을 다 쓰고...
지울까 하다가...그냥 남겨본다.
이 공간은 그냥 흐르는대로 쓰기로 작정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