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예배 2- 여행 일상(동경)
2013년 12월 초 12일간 동경으로 여행을 떠났었다.
그 안에서 문득 떠오른 단어가 ‘예배자’로 살아가기 였다.
일종의 결심이었다.
‘열심히 공원을 돌며 운동하며 기도해야지’
‘성경도 열심히 보며 더 깊은 하나님의 마음을 연구하고 지혜를 구해야지’
결심했다.
다짐하듯이
내가 이런 화려한 거리를 걸어도 내 시선을 다른 것에 돌리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리라! 결심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여행이 몇일 지나자
난 어느새 여행자로서의 일상에 흡수가 되어버렸다.
급하게 걷는 행인들 사이에서
고도화된 동경의 화려하거나 외로운 풍경은
나를 고독하게 했고
나를 주눅들게 했다.
방사능의 공포는 마음 속에 꼭꼭 접어둔 채 살고는 있었겠지만…
이들의 일상은 여전한 듯 했다.
‘예배자’라는 용어가 어느샌가 특별한 계층을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되어버렸다.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는 있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명명하지는 않은지 오래이지 않은가?
만약 그 예배자라고 명하는 자가
고도로 발달된,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 분을 사랑하는 일이
생각보다 무척 어려워진 사회에서 생존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신주쿠 중심부에 자리한 S 일본인 교회처럼
매일 매일을 ‘예배’라는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 세상과 나를 분리하는 작업을 해야지만 가능한가?
마치 광야에 머물며 메시야를 기다리며 자신들을 순수하게 지켜냈던 누군가들 처럼 말이다.
말 그대로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며
그 안에서 시간을 떼어내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다니엘 같은 ‘예배자’로 사는 것은 불가능할까?
‘찬양 사역자 김도현’ 이라는 이름을 철저히 배제한
동경 여행은
사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들이 얼마나 어려운지 처절하게 배운 시간이기도 했다.
여지껏 나의 여행 대부분은 교회 공동체가 나를 누구인지 인식하는,
매시간 시간을 ‘사역자’로 살아야 하는 여행이었다.
그 여행이 짧든 길든…
거기서 ‘예배자’입네 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동경 시내에 한구석
자그마한 숙소에 머무는 나는
편의점을 기웃거리며 조금 더 저렴한 도시락을 결정하는 것.
해독 불가한 일본어를 겨우 겨우 짐작하며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것.
어스름 어두워지는 길거리를 외롭게 거닐다가 갑작스레 내리는 비를 피하는 것.
그것이 여행 하루 하루 결정하고 생존하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나를 예배자로서의 삶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외부의 어떠한 시선이나
특별히 누군가 만들어 놓은 ‘예배’라는 특별한 자리가 아니면
전혀 예배자로 사는 것은 불가능 해 보이는 듯 했다.
*
point :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신 16:12
예배는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카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수컷을 드리는 것.
장자가 되는 것.
그저 문화적 형태로서의 예배를 추억하고
그것을 만들어내는데 집중하는 우리의 지금 예배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과 규례를 기억하는 것
그것이 예배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