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번에 걸쳐서 쓴 예수님의 길에 대한 묵상을
다시 씁니다.
더 작은 어린 아이의 심령으로 그리스도의 풍경으로
들어갑니다.
다시 '고운 가루'가 되기까지 되새김질합니다.
1.
다시 갈릴리에 왔다.
가버나움 뒷산에서 짙푸르게 펼쳐진 호수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야트막한 이곳은 동네의 뒷산 정도의 높이다.
게다가 키 높이를 자랑하는 큰 나무 하나 변변히 없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크고 높은 산이다.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준봉보다도 이 ‘에레모스’가 더 위대하게 느껴진다.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눅5:15
이 ‘한적한 곳’을 헬라어로 ‘에레모스’라 부른다.
갈릴리의 지도에서 바로 이곳이 ‘에레모스’라 되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곳에서 저녁에도 아침에도 기도하셨고 아버지의 말씀과
뜨거운 마음을 심장에 새기셨다.
그리고 역시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갈릴리의 제자들을 이곳에서 세우셨다.
내가 성경의 그 어떤 장소보다 가장 그리워하고 들어가고 싶었던 풍경이 있다.
갈릴리의 ‘해질 무렵’이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눅4:40
‘해질 무렵’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히브리어로 ‘에레브’라고 하는데 유월절 어린 양을 잡은 시간이다.
그리고 성전에서 저녁에 번제를 드리는 시간이고 유대인들의 기도시간이다.
해질 무렵엔 누구나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서 쉬는 시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이 세상에, 그것도 변방의 갈릴리에서
아프고 찢기고 상처투성이들을 부둥켜안고 기도하셨다.
그것이 주님의 안식이요 기도였다.
나도 누군가를 위해, 아픈 이들을 위해 뜨겁게 기도해 보아서 안다.
한 사람을 위한 진심어린 기도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독한 질병에 시달리고 멍에에 묶인 수많은 이들을 위하여
밤 새워 기도해 주셨다.
나는 갈릴리에 가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오랫동안 수많은 화산 활동이 있었고 온천이 발달해 있었다.
누구도 갈릴리가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맛’이라는 ‘온천’이 지금도 나오고 많은 이들이 이용한다.
로마 시대부터 이곳은 온천과 아름다운 풍광으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치유를 목적으로
휴양을 하러 왔다고 한다.
특히 여러 지역에서 아픈 이들이 치료를 위하여 온천을 찾았다.
그래서 더욱 병자들이 많았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 왔을 것이다.
피곤한 저녁 무렵,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기도하시기 시작했는데,
너무나 많은 이들이 몰려와 밤을 가득 채우고 말았다.
그리고 날이 밝자 이 ‘한적한 곳(에레모스)’에 오신 것이다.
그제서라도 쉬어야 하는데 습관을 따라서 오신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에 오면서 이전에 알던 예수님과 매우 다른 모습을 발견하였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처럼 하루에 세 번 기도의 시간을 지키셨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눅22:39
하나님의 어린 양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누가는 그 기도가 ‘습관’을 따라서 하신 것이라 기록했다.
나는 그동안 죽음을 앞두고 너무나 고민이 되어서 특별히 기도하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유대인들의 ‘저녁 기도’시간을 지키신 것이다.
‘습관’이라는 헬라어 ‘에도스’는 ‘관습과 법에 정해진 시간을 따라’라는 의미다.
누가는 다시 이 용어를 ‘전해진 규례(행6:14)’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철저한 유대인이셨던 것이다.
그동안 나에게 인식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사렛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은 매일 아침, 낮, 저녁시간에
세 번 기도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도, 갈릴리에서 밤새워 치유 하시고
다음 날 아침 ‘한적한 곳’에 가신 것도 이 습관을 따라 하신 것이다.
습관을 따라서 '아침 기도'를 하러 가신 것이다.
가버나움 뒷산 ‘에레모스’는 주님께서 매일 찾아 갔던 기도처이다.
예수님의 놀라운 ‘천국 복음’과 ‘하늘 권능’들은 이 간구의 습관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요14:12
2009년 세 번 째, 이스라엘에 왔을 때 나는 에레모스에 올라 이 말씀을 읽었다.
이전에도 읽었던 구절이지만 너무나 선명한 주님의 음성처럼 내 영에 울려왔다.
다른 이들은 이 말씀을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함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그가 행하신 삶을 본받아야 한다’고
깨닫게 되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일’의 헬라어는 ‘에르곤’인데 그것은 ‘행위’를 가리킨다.
그것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행하시고 사셨던 모든 삶의 여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내게 전율같은 충격을 주었다.
오랫동안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를 꿈꾸었는데, 그것은 ‘그가 하신 일을
행하는 것‘이다.
주님이 보이신 하늘 백성의 모범을 세밀하게 본받는 것이다.
요한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이것에 대하여 다시 쓰고 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일2:6
주님의 제자, 신부는 그 안에 사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것의 본질은 역시 예수님처럼 ‘행하는 것’이다.
요한은 ‘행한다’는 헬라어로 ‘페리파테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흥미롭게도 ‘두루 돌아 다닌다’, ‘돌아다니며 땅을 밟다’라는 뜻이다.
나는 이 말씀을 깨닫고 아무도 모르는 작은 다짐을 주님의 기도처에서 심령에
깊이 새겼다.
‘나도 주님처럼 그렇게 행하겠습니다.
주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그 하늘의 풍경을 밟겠습니다.
진리의 성령님 ...주님의 길로...본질적 의미로 인도해 주세요’
사도 바울은 이 하늘의 부르심을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롬8:29)이라 하였다.
나는 푸른 감람석 같은 진한 갈망으로 한동안 이 간구를 뿌리고 다녔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해주세요.
주님의 길을..그 여정을 진정으로 따르게 해 주세요.”
매일 습관처럼 드린 간구의 응답이었을까?
그 후부터 어쩐 일인지 이스라엘에 자주 오게 되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제자’로 살기를 작정하였다.
시퍼런 청춘의 방황기도 있었지만 마흔이 넘어서 다시 성령님을 만나고 온 생을
그분께 헌신했다.
성령님께 붙들리자 오히려 그 후의 삶이 청춘보다 더 뜨거웠다.
이제 쉰이 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라는 제자요 신부가 되기를 꿈꾼다.
물론 이전과는 다른 더 깊고 고요한 뜨거움으로 말이다.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주께서 가신 그 길의 풍경에 너무나 서고 싶어졌다.
그런 가운데 이스라엘 땅으로 인도되어서 온 것이다.
갈릴리 에레모스에 섰을 때, 나는 이것이 오래전부터 가장 꿈꾸던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영원 전부터 내가 가장 그리워하던 것이 ‘예수님의 길’에 숨겨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찾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일었다.
그리하여 지금 이 글을 쓰기까지 무려 16번이나 이 땅을 밟으며 그 길을 탐구하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예상하거나 계획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는 쉬운 일도 아니다.
이스라엘은 위도 상으로 한국과는 정확히 반대 지점인 서쪽에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이 말씀으로부터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땅 끝’까지 오는데
거의 2천 년이 걸렸다.
그리하여 이젠 동쪽의 땅 끝에서 이 ‘작은 증인’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관점, 운동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스라엘의 회복’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은 진정으로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골2:2,3
사도 바울의 이 전언은 나의 영혼을 불태우고도 남았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이시며 그 안에는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감추어져 있다.
예수님의 길은 우리가 간파하는 그런 단순한 수준이 아니다.
바울은 심지어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골2:9)고 하였다.
사람으로 오셔서 걸으신 예수님의 여정엔 ‘하나님의 신성’, 즉 ‘아버지의 비밀’과
‘마음의 충만’이 계시된 것이다.
이 ‘그리스도의 지식’을 소유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빌3:8)
바울의 심정이 만져졌다.
이 ‘보화’를 갖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팔리라 홀로 다짐했다.
그리고 수많은 시간들을 이스라엘 땅에서 간구하며 탐구에 투자하였다.
그러자 그 길에 감추인 비밀들이 하나씩 열리기 시작했다.